김순욱 박사가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수집한 진귀한 인석(도장돌)들이 가득한 진열장을 보여주고 있다.
인석(도장돌) 수집하는 은퇴부부 김순욱·옥환씨
서명이 일반화된 미국에서 쓸모 없어진 물품 중의 하나가 도장이다. 서예나 서화 등 예술작품의 낙관에나 필요할까. 한국에서는 은행이나 관공서에 갈 때 반드시 지참해야 했던 인감도장조차 집안 어느 구석에 보관돼 있는지 기억마저 가물가물하다. 도장은 나무나 고무, 수정, 대나무, 금, 뿔, 상아 등의 인재에 글자나 무늬, 기장, 그림 등을 조각한 것으로, 그 중 새기기 쉽고 아름다운 돌에 새긴 전각은 도장의 제 멋을 살리는 예술품이라 할 수 있다. 은퇴한 신경외과의 김순욱(75)씨는 아내 김옥환(72)씨와 함께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진귀한 인석(도장돌)들을 수집해온 예술가. 인석뿐 아니라 현대서예, 분재 등 은퇴 후 남다른 취미생활로 고풍스럽게 장식해놓은 노부부의 집을 구경하면서 ‘우리의 것이 좋아 우리 것 알리기에 여념 없는 삶’ 이야기를 들어봤다.
▲내년이면 결혼 50주년을 맞는 서예가 하농 김순욱씨와 동양화가 김옥환씨 부부. 벽에 걸린 현대서(왼쪽)와 동양화 족자(오른쪽)는 이들 부부의 작품이다.
40년간 세계돌며 모아
중국 비취과·계혈석등
명품도장 200개 소장
주문받으면 직접 새겨
서양인들에 최고 선물
서예·분재에도 일가견
명품도장 200개 소장
“기유년 늦은 봄에 하농이 내 당호를 찾아와서 돌을 펴고 이야기를 하던 끝에 손만 믿고 칼을 달리니 이와 같다…”
의학박사 출신 서예가 김순욱 박사가 진열장 속에서 백색의 인석 하나를 집어들어 보여주면서 읽어준 문구다.
하농은 김 박사의 아호로, 이 문구는 김 박사가 처음 서예에 입문하게 한 스승 철농 이기우씨가 직접 돌에 새긴 것이다.
문구 그대로 칼이 지나간 자리가 마치 붓이 지나간 것처럼 부드럽고 힘차서 돌에 새긴 전각인지 한지 위에 쓰여진 서도인지 멀리 보아선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필력이 살아있다.
“좋은 인석, 즉 도장돌은 색상과 질감이 뛰어날 뿐 아니라 석질이 무르고 입자가 작아야 한다”고 설명하는 김 박사는 “아무리 고귀한 대리석이라도 도장돌에는 적합하지 않은 이유가 이 때문”이라고 밝힌다.
진열장을 들여다보니 200개 가량의 도장돌들이 전시돼 있다.
김 박사가 지난 65년부터 수집한 것으로, ‘인’의 꼭지부분에 용, 거북이, 봉황 등의 상서로운 동물을 조각한 돌도 있고, 그냥 매끄럽게 갈고 닦인 화유석, 옥빛 찬란한 청전석, 붉은색의 선명한 빛을 발하는 계혈석 등 명품으로 대우받는 도장돌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중국, 한국, 일본, 네덜란드 등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수집한 돌들이지만 대부분 중국이 원산지라고 한다.
“이게 비취과(Jade family)야. 12년 전에 북경에서 두 개 1,000달러를 주고 샀지. 이 돌은 보는 순간 머릿속에서 피가 거꾸로 솟더라고. 워낙 값비싼 돌은 장식이 필요 없어. 돌 자체가 아름답잖아. 이 아름다운 돌에다가 자기 이름을 새겼다고 생각해 봐. 한마디로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이지”하며 김 박사는 청전석 같아 보이는 한 쌍의 돌을 보여주었고, 두 개의 돌을 한데 붙이니 무늬가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졌다.
다음으로 김 박사가 보여준 도장돌은 계혈석. 암스테르담의 어느 중국 가게에서 100달러에 구입한 계혈석은 우연히 가게에 들렀다가 돌을 본 그날 밤 주인에게 배달까지 시켜서 장만한 것이다.
처음 보는 순간 마치 돌에 닭피를 뿌린 것 같았다는 김 박사는 구입한 후 유심히 관찰해보니 바닥에 조그맣게 ‘닭피’(Chicken Blood)라고 새겨져 있었다고. 이 정도면 김 박사의 도장돌에 대한 식견은 전문가 수준이다.
원래 서예나 서화 작품에는 자기 이름이나 호를 쓴 후 도장을 찍는데 이 때 도장은 문인묵객 스스로가 새긴 것을 찍는 게 통례다. 그래서 김 박사는 이렇게 수집한 도장돌에 자신의 이름이나 아호를 새겨 낙관을 한다. 도장돌만 많은 게 아니라, 이름자를 새긴 막도장부터 아호를 새긴 아호인장, 작품의 소장을 확인하기 위한 수장인장 등 도장도 수백 개에 달한다.
우리것 알리려면 현지화 시켜야
아트 오브 잉크 인 아메리카 결성
서양인들 우리문화 이해 도움줘
뉴욕·중국·유럽 매년 순회 전시
김순욱씨의 현대서예 작품 ‘기(Tetra-tint)’
청죽, 송죽부터 대가 까만 오죽, 난쟁이 대나무 등 30개 가량의 분재화분들이 진열돼 있는 분재마당.
“도장 주문을 꽤 많이 받는데, 수집하기를 좋아하는 서양인들에게는 최고의 선물이지. 인장에 새긴 전각은 사방 한치의 예술이라고 하지. 글씨가 좋아야 각이 멋지게 나오거든. 그래서 인석이 중요한 거야. 좋은 인석은 장인이 아니더라도 쉽게 조각할 수 있어 문인과 화가들이 자신의 예술 혼을 불어넣어 직접 인을 새기지”
김 박사는 인석 외에도 현대서예 분야에도 일가견을 가진 서예가다.
곳곳에 걸려있는 현대서예와 동양화 작품들이 고풍스런 집안의 품격을 높이고 있는 거실을 지나 김 박사의 서재로 들어서는 순간, 인석 수집과 전각 이야기는 잠시 중단되고 김 박사가 은퇴 이후 매진하고 있는 한국 서예의 국제화와 현대화로 화제가 바뀌었다.
수도 설비가 돼 있는 바(wetbar)를 개조해 만든 작업실 겸 서재에는 붓들이 조롱조롱 매달려 있고 의학서적은 한 권도 찾아볼 수 없이 서예에 관한 서적들만 빼곡이 꽂힌 책장이 있다.
김 박사는 “서양에서 아름다운 서법(calligraphy)은 기공에 불과하지만 동양의 서예(calligraphy)는 정신 수양과 조형예술의 관점을 중시한다”고 표현했다.
단지 붓글씨, 서도가 아니라 고차원적인 조형예술이 서예이고, 현대서예는 전통 서예에 현대적 추상 개념을 가미해 새롭게 창출해낸 예술작품이라는 말이다.
김 박사가 보여주는 현대서 작품들 중에는 석고판에 글씨를 써서 만든 탁본도 있고, 한자로 오로지 ‘유’자를 여러 색을 조합해서 직접 만든 먹을 번지게 하는 테크닉으로 쓴 작품도 있었다.
“일각에선 전통서에 능하지 못해 현대서를 한다고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쓴 초서를 봐. 글씨만으로도 멋진 작품이라는 평가를 듣지만, 거기에 청묵으로 배경을 그려 넣으니 새로운 형상으로 나타나잖아? 필묵의 재해석이고 나만의 조형언어 창출이지”
그러니까 현대서는 전통서예의 내공이 쌓이지 않고는 또 하나의 작품으로 변신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세밀한 붓끝에서 흐르는 선과 점의 강약, 공간과 여백의 예술적 조화가 어우러진 멋, 그리고 찰나에 던져지는 순간적 에너지가 푸른 배경 속에도 뚜렷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것이 좋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지. 그러나 우리의 것을 세계에 알리고, 우리의 문화를 주류에 진출시켜 서양미술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면 서양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현지화 시키는 것도 중요하지”
김순욱 박사의 우리 것에 대한 애착과 현대서에 대한 열정은 ‘아트 오브 잉크 인 아메리카(Art of Ink in America) 그룹 결성으로 이어졌다.
지난 94년 김 박사를 초대회장으로 중국, 일본인 뿐 아니라 미국, 프랑스, 루마니아 출신의 서양 작가들로 창립된 ‘아트 오브 잉크 인 아메리카’는 이듬해 제1회 뉴욕 국제현대서전을 필두로 세계 각지를 돌며 매년 전시회를 열고 있다.
지난해 11월 중국 서안의 역사박물관(Xian History Museum)에서 열렸던 제8회 초대전은 유럽 예술가들의 관심을 끌어 2005년 이탈리아 플로렌스, 2006년 프랑스 파리 전시회 개최를 추진하게 했다.
마지막으로 김 박사의 앞마당에 자리잡고 있는 ‘조라사’를 둘러봤다. 조라사는 분재마당으로 김씨 부부가 장거리 여행을 떠날 때면 행여 시들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게 만드는 30여개의 분재가 진열돼 있는 곳이다.
돌에 철사를 감아 심은 석부작도 벽에 매달려 있고 흔히 볼 수 있는 청죽, 송죽부터 대가 까만 오죽, 난쟁이 대나무 등 분재 화분들이 놓여 있다.
사실상 이들 노부부의 집에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것이 한자로 쓰여있는 ‘조라사’라는 예사롭지 않은 팻말이었다.
김 박사가 직접 쓴 필체도 필체였거니와 뜻을 짐작조차 할 수 없어서다. 새를 잡는 그물을 일컫는 ‘조라’가 아니라 새 ‘조’자 위에 초두머리가 붙어있었다.
“‘조라’는 바위나 나무에 올라가서 기생하는 식물 이름이야. 은퇴하면 사회에 기생하며 사는 거니까…”
유머 섞인 말투로 조라사의 뜻풀이를 해주는 김 박사는 ‘백발의 노신사’라는 표현이 누구보다 잘 어울린다. 아마도 김 박사가 자신의 은퇴생활을 비유한 ‘조라’는 녹색 잎을 갖고 있어도 스스로 영양분을 만들지 못하는 ‘겨우살이’, 한자로 동청, 우목, 조라목에서 따온 말이 아닌가 싶다.
비록 기생하지만 높고 깨끗한 가지, 그 중에서도 명당자리만 골라 뿌리를 박고 사철 내내 놀고먹으며 신선놀음을 하는 기생목, 그러면서도 사람들로부터는 불사신의 상징으로 하늘이 내린 신령스런 나무로 숭앙을 받는 새나무 같은 삶을 살고 싶다는 김 박사의 여유가 조라사에 담겨있다.
<글 하은선 기자·사진 서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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