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년만에 다녀온 한국은 말만 통했지 외국이나 다름없는 낯선 곳으로 변해 버렸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올림픽이 한창이던 88년 잠시 들른 이후로는 한번도 가보지 못했었다.
76년 미국에 온 집사람은 28년만의 방문이어서 그런지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옛 동심의 기억을 더듬느라 마냥 즐겁기만 했다. 수퍼나 마켓을 돌아다니며 군것질하는 재미도 식어버린 중학생 아들과 초등학생 딸아이는 ‘보오링’을 외치며 집에 가자고 보챌 때마다 “비싼 비행기 타고 왔는데 아버지의 나라를 더 좀 느꼈으면...”하는 마음에 야단도 쳐봤지만 아이들에게는 어쩔 수 없는 낯선 땅인 듯 싶었다.
미국보다 더 잘 정돈되고 군더더기 없이 정비된 도로, 쓰레기통 찾기가 쉽지 않은데도 말끔한 거리, 계곡마다 넘쳐나던 소주병과 노랫소리, 향락객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자리잡은 선진국의 모습이었다. 들어가지 말라는 계곡 물에 발을 담갔다가 50만원의 벌금을 물었다니 먼 옛날 아무 계곡에나 들어가 텐트 치고 밤새 술먹고 떠들던 기억들은 옛말이 된 듯 싶다.
고교시절 등하교길 버스밖 차창으로 내다 보였던 허허벌판 강남은 생전 보지도 못했던 신도시로 새로 태어나 별세계가 돼 있었다. 그나마 낯익은 강북에 들어섰지만 향수를 부채질해줄만한 추억의 장소를 더듬기가 쉽지 않았다. 미국행 비행기를 탔던 1986년으로 정지해 버린 내 기억 속의 한국은 더 이상 그곳에 없다는 생각에 슬픔마저 밀려왔다. 문득 고국의 산하가 쉼 없이 뛰어 변화의 산을 훌쩍 넘어 내달리던 20년 동안 머리에 새치만 무성해진 나는 무엇을 했을까 자조적 질문을 던져보기도 했다.
한국에는 식당이 정말 많았다. 가끔 TV에서 보기는 했지만 이정도로 많은 줄은 몰랐다. 국도 길옆으로 수도 없이 늘어선 식당들은 차라리 구경거리가 될 정도다. 길안내로 나선 동창생의 해석이 더 걸작이다. “먹고 살 수는 있지 않느냐”는 대답이다. 자고 나면 생겨나는 식당. 먹을 것을 파는 집이니 최소한 굶어죽을 일은 없을 것 아니냐는 것이다.
한국의 없는자와 가진자와의 차이는 상상외로 컸다.
우리 가족을 태우고 설악산으로 향하던 동창생의 BMW SUV는 한번 기름을 채우는데 17만원이 들어가는데 미국 돈으로 환산하면 150달러쯤 되는 비용이다. 요즘은 세금추적이 심해 외제 고급차는 리스를 이용한다고 한다. 전문회사가 고급 승용차를 구입해 돈많은 사람들에게 렌터카 식으로 2~3년동안 대여해 준다.
문화재 보호차원에서 일정수의 예약 관람객 이외에는 고궁 관람이 안된다고 완강히 버티다가도 전화 한통이면 어디서 찍어냈는지 금방 입장권이 튀어나온다. 없다는 콘도도 방이 생겨나고 해결책이 없을 것만 같던 비행기표도 툭 튀어나오는 곳. 돈이면 안되는 것 없는 시절을 살아왔던 옛 기억이 살아나는 것 같아 오히려 정겹기까지 했다.
미주 관광단에 섞여 제주도에 갔다가 관광 가이드에 이끌려 간 상항버섯 농장에서 기이한 농민을 만났다. 제주 농민 대표라는 한 남성은 노무현 정부의 농민 정책이 실패하고 있다며 한바탕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 후 “농민들을 살려달라”는 절규 섞인 호소와 함께 상황버섯 가루를 내놓는 것이었다. 12개 한박스에 1개 덤으로 얹어 800달러. 5박6일 관광 일정 내내 가이드로부터 “짠돌이 미주 한인””고생하는 미국 동포”라는 은근한 구박(팁이 약하다는 말과 함께)을 버텨오던 일행들도 어쩔 수는 없었는지 주머니를 털어 너도나도 통째로 사들고 나왔다. 나중에 알게됐지만 다양한 상품을 그때마다 바꿔가며 보수성 강한 미주 한인들의 가려운 곳을 교묘하게 긁어주는 ‘앵벌이식’ 판매 전략을 쓰는데 그 실력이 대단해 교포들이 ‘속는 셈치고’ 사준다는 것이다.
서울의 잘 뚫린 지하철을 타고 달리다가 출입문에 부착된 티커식 선전물에서 눈길을 뗄 수 없었다. 하루 54만원의 최저임금을 75만원으로 올려달라는 절규 섞인 내용이었다. 미국돈으로 한달 450달러다. 서민들이 몰리는 남대문 시장 떡볶이 한접시에 3500원(3달러), 가락국수 한그릇 4,000원(3달러50센터)은 햄버거 1개 값과 맞먹는다. 서울의 물가가 결코 미국에 뒤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는 게 용했다.
쭉쭉 뻗은 고층건물의 선진국, 친구 말대로 서울에 ‘학고방’만한 아파트 한 채 만 가져도 3~4억(30~40만 달러)의 재산가가 되는 한국을 다녀온 2주간은 적지 않은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이제는 돌아가 살집도 없어 가고싶어도 엄두가 나질 않을 것 같은 곳. 이민 18년만에 먼 이웃이 되어 버린 한국에는 추억만이 무성할 뿐 더 이상 머물 곳이 없음을 깨닫고 온 10일간의 짧은 여행이었다.
김정섭 사회부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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