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중 HIV 100배 줄인 억제제 나와… 백신·치료약 곧 개발
‘현대판 흑사병’서 예방·관리 가능한 만성질환으로 바뀌어
“ABC냐 CNN이냐.”
방송 채널 선택권을 두고 하는 고민이 아니다. 지난 11일부터 6일간 태국 방콕에서 열렸던 제15차 국제 에이즈회의에서 미국 대표단과 미국을 제외한 거의 모든 국가 에이즈 전문가들이 에이즈 예방 수단을 놓고 벌인 논쟁이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옹호하는 ABC는 에이즈 퇴치를 위해 금욕을 가장 중시하는 정책이다. ABC는 금욕(Abstinence)과 정조(Being Faithful) 그리고 콘돔사용(Condom Use)을 뜻한다.
반면 에이즈 운동가들과 전문가들은 가장 효과적인 예방책으로 콘돔 사용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들이 주창하는 CNN은 콘돔(Condoms), 깨끗한 주사기(Needles) 그리고 협상기술(Negotiating Skills)이다.
미국은 국제 에이즈회의측이 자신들이 내세우는 금욕을 비중 있게 다루지 않는데 대한 반발로 올해 대표단 규모를 지난해의 5분의1로 줄였고, 내년도 에이즈 퇴치를 위한 글로벌 펀드에 10억달러를 기부해 달라는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의 요청도 거부했다.
“좀처럼 금욕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시대에 혼전 금욕만 강조하는 것은 무책임하고 비인도적 처사로 금욕을 강조하는 미국의 정책은 에이즈 통제 노력을 크게 후퇴시키는 것”이라며 미국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음은 물론이다. 지난해 말 현재 전세계적으로 에이즈에 걸린 사람은 3,780만명에 이른다. 지난해에만 480만 명이 에이즈에 새로 감염됐고, 290만명이 에이즈로 사망했다.
1981년 에이즈가 세계의학협회에 처음 보고된 이래 최악의 감염자수와 사망자수를 기록했다. 이제까지 에이즈로 죽은 사람은 모두 2,000만명이 넘는다. 물론 국가별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약 530만명으로 가장 많고 인도가 약 510만명을 기록하는 등 아프리카와 아시아, 동유럽의 가난한 국가들에서 높은 감염률을 보이고 있다. 특히 근래 들어선 남성 10명당 여성 13명이 감염됐을 정도로 여성의 에이즈 바이러스 감염률이 높아지고 있다. 적절한 대비책이 마련되지 않으면 앞으로 6년 내 중국에서만 감염자 수가 1,000만명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기록만 본다면 가히 인류에게 던져진 대재앙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현대판 흑사병’ ‘인류의 천형’이라 불리며 20세기 후반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에이즈도 이제는 속속 개발되는 새로운 치료기술들 덕분에 관리 가능한 만성질환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이번 방콕 국제 에이즈회의에선 글락소스미스클라인사와 버텍스 파마수티컬스사가 개발한 새로운 HIV 프로테아제(단백질 분해효소) 억제제가 2년 이상 바이러스를 억제한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됐다. 제출 자료에 따르면, 다른 항레트로바이러스 제재와 함께 렉시바(미국에서의 상품명)와 리토나비르를 투여한 환자의 96%가 2년 후 혈액에서 바이러스가 검출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는 것.
또한 화이자는 임상개발중인 새로운 계열의 항 HIV제가 감염자들을 대상으로 한 임상 2상 실험에서 치료 10일만에 혈중 HIV 수치를 10∼100배 감소시켰다고 밝혔다. 화이자가 개발중인 UK-427, 857은 HIV가 인체 면역세포에 침입한 후에 증식을 억제하는 기존 항HIV제와 달리 HIV의 세포 침투 자체를 차단하는 HIV 진입억제제이다.
역시 HIV 진입억제제 SCH-D를 개발중인 셰링-플라우는 지난 2월 유망한 2상 임상 결과를 보고한 바 있다. 현재 제약사들 간에는 HIV의 세포 진입 자체를 억제하는 항HIV제를 개발하려는 경쟁이 치열하다.
물론 아직까지 에이즈를 완치할 수 있는 치료제는 나와있지 않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HIV가 어떻게 감염되고 인체 내에서 어떻게 증식하는지 그 작용 메커니즘을 알고 있기 때문에 완치제나 에이즈 백신 개발이 그리 멀지 않은 일이라고 전망한다. 미국과 태국 연구진은 이미 태국인 자원자 1만6,000명이 참여한 가운데 에이즈 백신 알백(AlVAC)과 에이즈백(AIDSVAX)의 효능을 확인하기 위한 대규모 임상 시험을 진행중이다.
이렇듯 치료제가 놀라울 만큼 발전을 하고 있음에도 에이즈가 여전히 인류의 안전을 위협하는 무서운 재앙으로 남아있는 건 아시아나 동유럽 그리고 아프리카 국가들의 미온적인 에이즈 대책과 일반인들의 에이즈에 대한 무신경 때문이다.
유엔 에이즈퇴치계획(UNAIDS) 보고서는 긴급한 치료가 필요한 10명 가운데 9명이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예방이 필요한 5명 가운데 1명만이 실제 예방 혜택을 받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에이즈 환자들을 사회로부터 고립시키고 두려움과 수치심에 스스로를 포기하게 만드는 사회적 편견도 에이즈 감염을 확산시키고 있다. 국제에이즈회의 창립자이기도 한 보스턴 대학의 빈센트 J 린치 박사는 “매년 수만 명의 사람들이 자신의 감염 사실을 두려워한 나머지 검사 결과를 확인하지 않고 있다”고 말하면서 “에이즈는 예방과 관리가 가능한 질병으로 에이즈 환자에 대한 사회의 인식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방콕 회의에서 발표된 한 여론조사에서 에이즈 환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게 뭐냐는 질문에 환자들의 60.4%가 치료약 보다는 사회적 관심이고 차별이나 불공평한 대우를 받지 않는 것이라고 답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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