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상<수필가>
오래된 서류철을 정리하다가 연필로 그린 그림 한 장을 발견했다. 지금은 결혼하여 집 떠난 지 오래된 큰아들이 그린 거였다. 상단에 MY FATHER, 하단에는 BY AUSTIN RHEE,대문자로 써놓지 않았다면 그림 속 남자가 나라고 믿을 구석이라곤 없어 보인다.
그냥 일별하고 버리려다 전면에 82년 11월 17일 8시31분까지 명시한 점과 평소 글씨를 작게 쓰던 아이가 반항하듯 큼지막하게 쓴 이유가 무엇일까, 잠시 그림이 주는 메시지를 찾아 과거로의 여행을 떠나보았다.
년도를 환산해보니 아이는 아홉 살, 내 나이 38세였다. 미국식품점과 신문에 글을 연재한지 똑같이 2년 째되는 정신 없이 바빴던 시절이었다.
그림 속의 나는, 얼굴, 몸통, 하체가 정확하게 삼등분 된다. 머리통이 몸의 3/1이니 그런 가분수도 없을 터였다. 요즈음 아이들이 아빠를 엄마보다 작게 그리는 것처럼 그 때 우리 아이도 나의 신체 중에서 얼굴이 제일 관심이 갔던 것 같다.
두상과 얼굴부터 들여다보자. 단정하다고는 볼 수 없는 머리칼은 지금처럼 오른쪽 눈 섶 위까지 흘러내렸다. 두터운 눈 섶 아래 곱지 않은 두 눈. 콧날은 두 줄이 나란히 내려오다가 끝 부분에서는 구술처럼 동그란 콧구멍 두 개로 마무리된다. 내가 심하게 코를 골았으니 구멍을 부각 시켰을 것이다.
나는 인중이 짧고 입도 작은 편이다. 그런데 그림에서는 인중이 광야처럼 넓고 면도가 안된 수염들이 두 줄로 입까지 내려온다. 엄청 큰 입매는 굳게 닫쳐진 체 활처럼 양쪽 끝이 아래로 휘었다. 우리아이들은 아빠는 목소리 큰사람, 화나면 나팔 통이 된다고 놀렸으니 내 입은 크게 그려질 수밖에 없다.
무언가 좀 이상해서 자세히 보니 얼굴 양쪽에 귀가 없다. 모르고 빼먹은 게 아닐 터였다. 저희들의 말을 전혀 들으려하지 않고 말하다가 5분만 지나면 화낸다고 불평했으니 나의 듣기 불량에 대한 불만 표시인 듯 싶다.
또 하나 없는 것은 목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목 짧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는데 이상한 일이다. 생각해보니 고개 숙인 남자란 목을 구부린 힘없는 남자다. 숫제 목이 없다는 것은 굽힐게 없다는 뜻이다. 적어도 자기 아버지는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가는 남자로 믿었던 것 같다. 화난 것은 아닌데 긴장된 표정이다. 그러고 보면 그 시절 미국인들이 내게 많이 하던 말 중에 하나가 스마일! 이였다. 이런 것들로 인하여 실제로는 박력 없는 얼굴인데 그림 속의 나는 단단하고 둥근 윤곽에다가 턱 아래 수염자국까지 튼실한 남자로 보여진다.
큼직한 얼굴은 몸통 위에 놓여있고 거기서부터 각진 어깨 없이 선은 팔로 이어진다. 팔이 몸에 비해 굵다. 매일 저녁 늦게 까지 일하는 팔뚝, 아니면 두 놈이 달려들어도 팔씨름에서 끄덕 없던 팔이 굵은 것은 당연한 귀결이렷다.
팔짱 낀 자세다. 오른손은 가려져 꼭지만 보이고 왼손은 영락없이 권투 글러브를 낀 형상이다. 툭하면 지들 머리에 알밤 주던 그 손이 크게 보였을 것이고 내가 왼손잡이 인 것도 정확히 파악해 냈다. 상체가 무거워서인지 다리는 휘어 있었다. 다리 좀 펴고 다니라는 주변의 충고가 생각나는 것을 보면 대단한 관찰력이다.
가슴이 패인 두 개의 칼라와 줄이 선 바지로 그 시절 간편한 의상도 전부 표현한 셈이다. 전체적으로 선을 아꼈는데도 총기가 가슴을 겨누던 시절 그 비감에 젖은 기억들을 담아내고 있다. 그런 대로 세련되지는 못해도 비루 해 보이지 않음은 젊었기 때문이리라. 끝까지 의미를 찾아내지 못한 부분은 무릎 사이를 가로지르는 선이 오른쪽 모서리에서 불끈 솟음으로 마무리된 점이다. 황야의 언덕에 선 남자 모습처럼 보인다.
그림 오른 쪽 끝에 세 줄의 사선은 바람일 게다. 세상사 거센 풍랑을 막아주는 방파제인 아버지 모습, 휴일 없이 살아온 나의 세월이 아이들 머리에 각인 된 것 같다.
그 때문인지 두 아들은 지금, 시간 없다며 골프는 시작도 않는다. 어찌나 바쁘게들 사는지 특별한 날이 아니면 얼굴들 보기 힘들다. 아이들이 전화라도 할 때면 나는 언제나 바쁘다라고 응답했던 일들과 웃으며 밝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지난날들이 미안하고 아쉽다. 아이는 나를 일깨우기 위해 마음을 비추는 거울처럼 그려주었던 모양인데 나는 그때 깨닫지 못하고 이제서도 정신 못 차리고 아전인수로 해석해 버린 건 아닌지 모르겠다.
소멸되어 가는 과정이 인생이라면 따뜻한 아이의 관심으로 흐릿한 유형(有形)으로 나마 종이 한 장으로 남겨진 초상이 지난날 연민이 담긴 평가서라는 생각은 끝내 지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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