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상<수필가>
70년도 이전에 이민 온 한인들은 김치와의 결별을 각오하고 고국을 떠났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면 속이 느글거려 캐비지에 고춧가루를 뿌려서 먹으며 견뎠다.
그 시절 C박사는 다행이 결혼한 학생부부여서 주말에 유학생들이 몰려오면 제대로 된 캐비지김치를 먹여보냈다. 그도 못하면 김치 대신인 올리브를 사다 먹는데 너무 짜서 밥에 물을 말아야 했다.
우리 가족은 78년 1월 13일 밤 김포공항을 떠나 하와이에서 입국 수속하고 한밤중에 로스앤젤레스 공항에 내렸다. 지친 몸으로 대한 항공 직원인 친구 집에 가서 김치를 보니 목이 메었다. 다시 늦은 밤 동양인은 우리뿐인 샌프란시스코 행 비행기를 타고 버틴 건 그 김치로 충전된 힘이었을 것이다.
그 때 한국에 계시던 어머님이 보내주신 소포를 풀어보면 면으로 된 속옷에 숨겨보낸 고춧가루가 터져 범벅이 되어 있었다. 다른 나라 고추는 더 맵긴 하지만 맛을 내는 아미노산이나 당분이 한국 고추의 절반에도 못 미치니 김치 담글 때는 한국 고추가 최고였다.
나의 유년, 피난시절에는 배추가 비싸 어머니는 싼 무를 사다가 깍두기만 만드셨다. 그때 물렸는지 남들은 깍두기의 상큼한 맛이 그만 이라지만 지금도 나는 김치가 좋다. 너무 아파 며칠을 누워있으니 어머니는 김치 한보세기를 얻어 오셨다. 물 말은 밥에 올려진 김치가 깔깔한 입안으로 넘어가던 기억이 난다.
강원도 홍천에서 군 복무 할 때 하숙집에서는 365일 김치였다. 정말 이가 갈렸다. 울진 간첩사건으로 초급장교들은 영하의 추위에 굶주리며 일주일 동안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하숙집으로 들어서며 모두들 아줌마 김치하고 고추장! 커다란 함지박에 쏟아 붇고 밥 비벼 함께 먹던, 세상에 그런 꿀맛이 또 있을까.
이민 온 그 해 여름 로스앤젤레스까지 중고 소형차를 몰고 구경갔다. 자그마한 한국식품점에 진열된 갖가지 김치들을 보고 여기가 오아시스구나, 거기 사는 친구가 부러웠다.
77년 2월 덴버의 한 아파트 단지 내에 한인 두 세대가 김치 냄새에 못 견디겠다는 아파트 주민들의 항의를 받았다. 2년 동안 아무 말 없다가 이제 문제삼는 것은 자기들을 몰아 내려는 저의라고 한인들도 버티었다. 덴버 한인회장도 법적 하자가 없는 한 적극 대응키로 했으며 결국 김치 문제가 법정으로 가게 되었다. 담당 판사는 음식냄새를 판결 할 수 없다는 기지를 발휘, 화해를 종영하고 5분만에 재판을 끝냈다. 원고는 소송을 취하하고 한인들은 자진 퇴거했다. 김치를 포기하고 전처럼 머물 것인가 아니면 김치와 함께 떠날 것인가 에서 후자를 택한 것이다. 아마 나 같았어도 그랬을 것이다.
영어사전에 제일 먼저 올려진 한국어가 김치, 외국인들에게 가장 알려진 것도 김치였다. 해외 사는 한인들로서는 김치 냄새가 주는 수치심보다는 한인의 정체성까지 연계된 먹고사는 가치를 존중받고 싶었을 것이다.
한인들과 함께 김치도 어려운 과정을 극복하며 국제 식품 대열에 들어서고 있다. 내가 다니던 직장의 슈퍼바이저 금발의 여인은 한국인 태권도사범 얼굴이 새겨진 티이 셔어츠를 입고 햄버거 안에 김치를 넣어 먹었다. 존경하는 사범께서 김치를 먹어야 힘이 난다고 했단다. 미국인 고객이 더 많은 오클랜드 한국식당 H여주인은 미국 TV에 출연하여 김치를 소개했는데 열심히 설명을 듣던 흑인 촬영기사도 김치를 손으로 집어 맛있게 먹더란다.
그러나 김치를 싸들고 다니는 여행객 때문에 호텔이나 모텔에서는 한인들이 떠나고 나면 코를 막고 청소하게 만들었다. 사실 먹는 것을 탓하는 것처럼 치사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마는 타민족의 음식 냄새를 못 견뎌 한다면 김치에 대한 알맞은 절제도 멋스러움이 아닐까.
요즈음 김치 종주국인 한국이 일본과의 김치 전쟁에 이어 중국과도 시작되었다. 한국전쟁 때는 중공군 인해전술에 밀리더니 이제는 중국산 싼 김치에 밀려 한국은 김치 수입국이 되었다. 한국 대형 서점 안 간이식당에 가보면 젊은이들은 햄버거 샌드위치를 사먹는다. 이들이 이민 오면 김치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미국에서 장가 간 아들집 식탁에 김치 없음처럼 왠지 서운해진다.
홍길동을 쓴 허균은 귀양갔을 때 너무 배고파서 먹고 싶은 음식을 되뇌이다가 <도문대작>이라는 음식 책을 썼다. 김치도 예나 지금이나 삶이 급박하고 절실할 때 찾는 음식인가보다.
아랍 테러범들에게 억울하게 죽은 김선일씨가 친구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김치랑 자장면이 제일 먹고 싶다는 대목에 이르러 목이 메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제사상에는 김치 없는 게 이상하다. 내가 세상 떠난 훗날 일년 중 하루만이라도 아이들 밥상에 아비를 생각해서라도 김치 한보세기 놓여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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