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끄러운 외교가 옳다. 아니다. 조용한 외교가 옳다. 80년대 초, 그러니까 레이건 행정부 초기 해외정책을 둘러싸고 벌어진 공방이었다.
이런 말도 나왔었다. 전체주의형 독재와 권위주의형 독재를 구분해야 한다. 그리고 권위주의형 독재체제에는 조용한 외교를 구사해야 한다. 전체주의형 독재체제에는 시끄러운 외교를 사용해야 하고.
레이건 행정부의 입장이었다. 사실 답답했었다. 반공(反共)을 빌미로 탄압이 자행된다. 그 정통성 없는 정권을 미국은 단지 친미(親美)노선이라는 이유로만 묵인한다. 미워도 ‘내 s.o.b.’란 루즈벨트의 정책을 답습하고 있는 건 아닌지.
라틴 아메리카와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동남 아시아. 그리고 한국에서의 80년대 상황이었다. 이 독재체제에 대해 워싱턴은 왜 침묵하는가. 시끄러운 인권외교, 카터 전 행정부의 외교정책이 큰 효과를 보지 못한 탓인가. 아니면 이중 잣대의 정책인가.
여하튼 조용한 외교의 이론적 근거는 이랬던 것 같다. 권위주의형 독재. 말하자면 제3 세계형 독재체제는 체제전이의 가능성이 있다. 공산주의로 대표되는 전체주의 체제는 그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다. 권위주의형 독재자는 그러므로 달래서 민주체제로 전환을 가져오게 해야 한다.
공산체제는 그게 아니다. 소련을 서슴없이 ‘악의 제국’으로 지칭한 레이건 발언도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레이건이 타계한 지금 그에 대한 찬사는 주로 소련과의 냉전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쏟아지고 있다. 그 유명한 ‘악의 제국’ 발언, 또 ‘베를린 장벽을 헐라’는 발언 등은 이제 와서 보면 하나의 예언으로 받아들여진다.
공산주의 소련체제의 사악한 속성을 꿰뚫어 보고 그 악의 제국 붕괴를 마치 예언자처럼 내다보았다는 찬사다.
조용한 외교로 일관한 아시아에는 레이건은 그러면 무슨 영향을 미쳤을까. 평가는 인색했다. 별 영향을 주지 못했던 듯 해서다. 그러나 20여년의 세월이 지난 현재 다른 평가가 나오고 있다. 80년대 아시아를 휩쓴 ‘피플 파워’ 민주화 열풍 뒤에는 조용한 외교가 있었다는 평가다.
1980년 11월 대선에서 승리한 레이건이 서둘러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은 전두환이었다. 한국 사태는 다음해 1월 대통령 취임 후를 기다리기까지는 너무 긴박히 돌아가고 있었다. 광주사태가 발생했다. 김대중씨가 체포됐다. 사형이 선고됐다.
레이건은 전두환과 거래를 했다. DJ를 석방하고 미국 망명을 허용하라는 거다. 그 대가는 전두환의 워싱턴 방문이다. 그리고 레이건도 답례 차원의 서울 방문을 한다는 것이었다.
전두환 정권에 대한 압력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단임 약속을 반드시 지키라는 것이었다. 그 압력의 창구는 개스턴 시거. 당시 국무부 차관보였다. 집요한 압력에 전두환은 결국 85년 이른바 3김의 부분적 정치참여를 허용했고 결국 6.29 선언과 함께 단임 약속을 지켰다.
물론 한국민의 반(反)독재 항쟁의 결과다. 그러나 조용한 외교를 통한 레이건 행정부의 압력도 한 몫을 했다. 그 결과 한국의 신군부는 6.29 선언을 통해 마침내 항서(降書)를 쓴 것이다.
필리핀 상황도 흡사했다. 마르코스에 대한 압력은 날로 가중됐다. 조용한 외교창구 역할을 담당한 사람은 레이건과 절친한 폴 랙설트 상원의원이었다.
필리핀 군부가 마침내 등을 돌렸다. 6.29 선언과 비슷한 성명서를 발표한 것. 그리고 빌 케이시 CIA국장의 최후통첩이 뒤따랐다. 마르코스는 망명하고 결국은 ‘피플 파워’의 승리로 끝났다.
1981년 레이건이 40대 대통령에 취임했을 무렵 아시아 지역에 민주국가는 일본 하나밖에 없었다. 1989년 물러날 때에는 한국이, 필리핀이, 그리고 대만이 민주화 됐다.
더 거대한 지진이 곧 뒤따른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동구권에 민주화 도미노 현상이 발생했다. 그리고 소련 엠파이어, 악의 제국 그 자체가 무너진 것이다.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라틴 아메리카, 아시아, 그리고 동구권을 휩쓴 80, 90년대의 민주화 바람은 ‘자유에의 위대한 비전’을 바탕으로 한 레이건 외교정책의 승리라는 이야기다.
여기서 한번 공상을 해본다. 레이건 정책의 계승자는 조지 W. 부시다. 이런 부시 행정부 출범 4년 째. 역시 엄청난 변화가 따랐다. 9.11 사태에서 시작된 그 변화는 여러 가지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민주화의 거대한 바람이 돼 아랍권을 휘젓고 있다.
카불이, 바그다드가 해방됐다. 바람은 어디까지 확산될까. 테헤란, 리야드. 다마스커스…. 그 바람의 끝은 그리고 평양으로 이어지는 게 아닐까. 지나친 기대인가.
옥세철 논설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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