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개여행
지난 메모리얼 연휴에 우리 가족은 1박2일로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사실은 특별한 여행 계획이 없어서 그저 사흘 푹 쉬면서 각자 밀린 일이나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금요일 밤이 되자 모처럼의 황금연휴, 아까운 생각도 들고, 오랜만에 어디 좀 다녀올까 싶어지면서 남편과 부랴부랴 지도를 펴놓고 연구에 들어간 것이다.
LA에서 너무 멀지 않은 곳, 사람들이 많이 가지 않는 곳, 그리고 우리가 한번도 가보지 않은 곳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LA 북쪽으로 200마일쯤 되는 곳의 론 파인(Lone Pine)이란 곳에 ‘필‘이 꽂혔다. 5번 타고 북상하다가 14번을 갈아타고 올라가 395번 하이웨이를 만나 계속 북쪽으로 가다보면 나오는 작은 도시.
관광안내서를 보니 이곳은 미국에서 가장 높다는 위트니 마운튼이 시작되는 초입이며 맘모스 스키장과 데스 밸리 갈 때 들르게 되는 곳으로, 해발 6,000여피트까지 차로 올라가서 위트니 산에서 하이킹을 할 수 있을뿐더러 인근의 앨라배마 힐스라는 돌무더기 산이 장관이라는 설명이 곁들여 있었다.
바로 여기야! 우리는 만장일치로 합의를 보고 준비를 시작했다. 아무래도 하룻밤은 자고 와야 여유있게 구경할 것 같아서 좀 떨어진 곳에 베스트웨스턴을 어렵사리 예약했다. 연휴 시작 바로 전날 밤 숙소 예약이 가능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뭔가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느낌에 몹시 흥분되었다.
다음날 아침 일찌감치 샌드위치를 싸고 물 세병만 들고 단촐하게 출발하였다. 우리 가족은 여행을 적지 않게 다니는 편인데 이번처럼 사전 계획 없이 즉흥적으로 간 적은 한번도 없었기 때문에 몸도, 마음도, 짐도 아주 간편했다.
평소 여행을 간다하면 남편과 아들은 오래 전부터 계획을 세우고 짐을 챙기고 하면서 먹을 것을 잔뜩 사다 재어놓아서 자동차 안은 언제나 수많은 과자와 간식봉지들로 가득 차곤 했다. 또 커다란 아이스박스를 반드시 두 개씩 가지고 다녔는데 한 개는 각종 음료수용, 다른 한 개는 과일과 밑반찬용이었다. 언제나 밥을 두세끼는 해먹었으므로 쌀과 밥솥 역시 필수였고, 일회용 그릇과 식기들, 칼과 가위, 페이퍼타월 등 한 살림이었던 것이다.
그러자니 떠나기 전날 밤이면 나는 그 모든 준비를 하고 짐을 싸느라 거의 잠도 잘 수가 없었다. 짐도 내가 점검하지 않으면 두 남자는 마치 이사가는 것처럼 옷이란 옷은 죄다 내놓고 한없이 꾸리기 때문에 적절히 제동을 걸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아무 준비 없이, ‘밥 살림’ 없이 떠나게되니 나는 마치 날아갈 것만 같았다.
론 파인까지 한번도 안 쉬고 3시간반 정도 달려서 도착했다. 점심을 사먹고 곧장 들어간 앨라배마 힐스. 그곳에서 우리는 이제껏 가본 곳 중에서 가장 멋있는 돌산의 풍경에 넋을 잃었다. 광활한 황야에 기묘하고 희한한 모양의 돌들이 수없이, 겹겹이 쌓여있는 모습은 충분히 압도적이었다.
서부영화를 200여편이나 촬영했다는 곳인데 전혀 관광지화 되어 있지 않고, 표지판 하나 없는 비포장도로여서 운전이 힘들었지만 그 황량한 풍경에 우리 가족은 완전히 매료되었다.
거의 두시간 돌아다니는 동안 사람도 차도 거의 만나볼 수 없을 만큼 원시의 자연 그 자체. 햇볕이 뜨겁게 내리쪼였지만 우리는 곳곳에 차를 세우고 신기한 모양의 바위산에 올라 감탄을 하며 사진도 찍고 쉬기도 했다.
다음날 올라간 위트니 산은 또 다른 감동이었다. 세코이야나 킹스 캐년처럼 아름드리 나무들이 하늘을 찌르는 풍경은 아니었지만 눈 덮인 높은 산의 위용과 산아래 탁 트인 절경이 도심에 찌든 마음을 맑게 씻어 주었다. 위트니 산 역시 일반 관광객을 위한 곳은 아니었다. 등반가들이 산을 오르기 위한 베이스 캠프의 성격이 더 짙어서, 우리가 돌았던 4마일의 하이킹 트레일은 생각보다 험하고 힘든 코스였다.
어느 여행보다 여유롭고 자유로웠던 트립.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두 남자는 슬그머니 반칙을 범한다. 저녁을 사먹자고 했던 예정을 슬쩍 변경하고는 “비프 저키나 먹으면서 그냥 가지 뭐” 이러는 것이다. 그 말이 무슨 뜻인가. 집에 가서 밥 해달라는 것이지. 덕분에 짐도 못 푼 채 부엌으로 직행해야 했지만, 뜻밖에 떠났던 번개 여행, 주부 입장에서 이것처럼 좋은 휴가가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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