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동 휘 (소설가)
따르르, 따르르......
늦은 시간에 누구일까? 나는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쳐다봤다.
여보세요?
아빠, 귀염둥이 세미예요.
아, 그래 세미구나. 어쩐 일이냐?
아빠, 오랫동안 찾아뵙지 못해 미안해요. 엄마도 안녕하시죠?
그래 잘 지내고 있다. 원서방도 잘 있고?
네. 내일 아빠 엄마 뵈러 가려고요.
왜, 무슨 일이 있어?
일은요. 오랜만에 맛있는 음식 해드리려 원 서방과 같이 갈게요.
허허, 역시 막내둥이구나. 그래 그러래 무나.
나는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무어가 오래 되었다고 하나. 두 달되었나? 마누라가 찻잔을 들고 나오다 묻는다.
막내예요? 무슨 일이 있대요?
일은 무슨 일. 내일 맛있는 저녁 해주러 온다고 하구먼.
일년이 넘었는데 왜 소식이 없지? 막내 외손녀 한번 안아 보기가 참 어렵구나.
빨리 비디오 테이프나 넣어요.
나 아직 귀 안 멀었어요. 좋은 소식 전하려 오는 것이 아닐까?
저리 비켜요. 화면이 안 보이잖아.
결혼해 처음엔 친정에 온다고 하면 좋아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반가움보다 걱정이 앞서고 있었다. 그런 나의 마음을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딸 걱정을 하는 마누라의 말에 찬물을 뿌리듯이 퉁명스럽게 뱉었다. 아내는 막내가 온다는데 왜 저렇게 심술을 뿌리고 있냐 는 듯이 눈을 흘낏하고는 소파에 앉는다. 아내는 텔레비전 화면에 신경을 주느라 더 말이 없었다.
딸 둘을 키울 때는 귀엽고 애교 스러웠다. 정말 눈 속에 넣어도 안 아플 것 같았다. 그런 딸이 지금은 애물단지 같은 마음이 왜 생길까? 딸 둘은 자라면서 시집안가고 아빠랑 살겠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자기들 방을 꾸미고 앙증맞고 보기 좋다는 물건들을 집안으로 들고 들어왔다. 이것은 아빠 방에, 리빙룸에 자기들이 집안장식을 하고들 있었다. 우리 두 노인네의 생각과 취향은 묻지도 않고 완전 일방 통행을 하고 있었다. 우리부부는 시대도 변하고 저 애들이 시집갈 때까지 젊은 사람의 취향에 맞추면서 편안하게 살아가자고 하였다.
나는 가끔 남자애들만 있는 친구 집을 방문하면 아기자기한 멋이 없어 보였다. 여기저기 장난감들이 흩어져있고 집안도 허술해 보였다. 나는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들여 구경을 시켜주면서 딸 자랑하는 것으로 아들 없는 것을 큰 위안으로 생각하면서 아쉬운 마음대신 그냥 흐뭇해하며 즐거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 두 딸이 나이를 먹자 부모보다 먼저 자기들의 짝을 찾아와 결혼을 하겠다고 하였다. 언젠가는 떠나갈 자식이라고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었지만 막상 그런 소리를 듣자 마음 한 구석이 텅 비는 것 같았다. 역시 딸자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두 딸을 시집보내고 우리 부부는 가끔 찾아오는 외손녀를 안아보는 재미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딸들이 온다고 하면 기쁘고 즐거움보다 걱정과 무서움이 먼저 앞서고 있었다. 옛날엔 딸이 돌아갈 때는 참기름, 참깨, 고추, 떡들을 한 보따리씩 싸주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그냥 가지고들 가고 있었다. 딸이나 사위나 어쩌면 똑같은 심보를 가졌는지 모르겠다.
이것 우리 보라 방에 놓아주면 참 좋겠다. 백화점에 다녀봐도 이렇게 예쁜 것은 안보여. 엄마 가져가도 되죠?
그래 가져가 보라 방 예쁘게 꾸며줘라.
아빠, 이것 오랫동안 보셨죠? 이제 우리 가져가 봐도 되죠?
가져가 너희들 식구들이나 보도록 해라.
아빠, 다음에 올 때 더 좋은 것 사올게요.
이렇게 큰딸은 자기 딸을 앞세워 인형, 조각, 그림들을 하나하나 가져가고 있었다. 자식이 좋다고 하는데 어찌 안줄 수 있나.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보다 앞으로 남은 길이 더 짧은 것을 자기들은 앞이 구만리 나 남아있는 길. 그렇게 놓여있던 자리에 몇 년이 되어도 다시 메우지 못하고 텅 비어만 있다. 딸들도 떠나고 집안 여기저기 놓여있던 물건들도 하나씩 없어지고 있으니 마음은 더욱 더 쓸쓸해졌다. 그렇다고 왜 사오지 않으냐고 말도 할 수 없는 일.
그런데 막내는 언니와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한 부모 밑에서 태어났고 자랐는데 왜 다른 성격을 가졌을까? 막내 사위는 넉넉한 집안에서 성장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지금 직장에서도 꽤 넉넉히 봉급을 받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막내는 집에 왔다가면서 가져가는 것이 조그만 물건이 아니다. 부엌살림이나, 가전제품을 하나씩 자동차 트렁크에 실어 가고 있었다. 이번에 오면 또 뭘 들고 가려고 할까? 나는 드라마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고개를 소파에 기대고 생각해본다.
‘믹스기, 그것은 좀 오래 되었고, 휴대용 청소기, 으음 커피 메이커가 있구나. 그것은 산지도 얼마 안 되는데. 당분간 향긋한 커피는 못 마시겠구나.’
여보 드라마 안보고 뭐 생각하고 있어요?
한참 열심히 보고 있던 마누라가 뭐라고 했는데 내가 아무런 반응을 안하고 있으니 한마디하였다.
왜 보고 있잖아
또 안 봤다고 다시 보자고 하지 마세요. 전기료 많이 나와요.
나는 바로 앉으면서 눈을 드라마에 집중시키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내일 올 막내 생각만 하고 있었다.
‘딸은 출가외인’ 이라고 했는데 지금 전화를 걸어 친정에 출입하지 말라고 할까. 이런 저런 상념 속에서 드라마도 끝나고 나는 침실로 가 잠을 청하였다.
나는 다른 날 보다 일찍 일어나 집안 청소를 하였다. 사위도 손님인데 모처럼 오는데 집안이나 깨끗이 정돈되어 있어야 처가 집에 들어올 때 기분이 상쾌하겠지. 그리고 사위를 따뜻이 맞이해 주어야겠다. 그러면 그 사랑이 어디로 가겠나. 다 우리 막내한테로 가는 것이 아닐까. 나는 커피메이커를 깨끗이 닦아 막내가 부엌에 들어오면 쉽게 눈에 띠는 곳으로 놓아두었다.
딩동 딩동.
현관문 벨 소리가 들렸다. 나는 급히 현관문을 열었다. 거기엔 언제나 봐도 귀염둥이가 자기 남편과 나란히 서서 방긋이 인사를 한다.
아빠.
오! 나의 귀염둥이 빨리 와요.
나는 두 팔을 벌려 막내를 꼭 안아주었다. 막내 뒤에 서있는 사위의 손에 큼직한 박스가 들려있었다.
CD 플레이어 머신이 좀 오래된 것 같아 새것을 하나 사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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