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의 NBA
성격이 급하고 동작이 빠른 나에 비해 남편은 느긋하고 느린 편이라 나의 결혼생활은 그다지 순탄한(?) 편이 못된다. 지금에야 서로 많이 적응한 편이지만, 나의 템포로 볼 때 언제나 한 박자 느린 남편은 때때로 나의 속을 다 뒤집어놓곤 한다.
특히 운전을 할 때면, 과거 ‘총알택시’ 혹은 ‘서울택시’란 별명을 가졌던 나와 완전히 정반대로 하기 때문에 남편과 함께 차를 타고 갈 때마다 스트레스가 엄청 쌓일 각오를 해야 한다.
가장 대표적으로 내가 뒤집어지는 날이 매주 일요일. 교회 가는 날이다.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일요일 아침이면 나는 주스 짜주고, 커피 끓여주고, 두 남자 아침식사를 정식으로(주로 스크램블 에그에 햄 두쪽, 토스트, 샐러드나 과일, 수프) 차려준 다음, 샤워하고 화장하고 머리하고 나서도 제시간에 현관 앞에 나가 섰는데, 남편은 신문, TV 보다가 차려준 아침만 먹고는 화장도 안하고 머리도 안 하면서 언제나 늦게 나오니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것이다.
게다가 그렇게 늦었으면 운전이라도 빨리 해야할텐데 세월아 네월아, 앞차만 따라서 레인 체인지도 안하고 ‘안전운전’을 하고 있으니 더 속이 터지지 않겠는가. 그렇게 매주일 화가 나서 ‘시험에 든 채로’ 예배에 참석한 지가 15년, 사람마다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이 있는데 바로 남편의 ‘느림의 미학’이 그것이다.
그런데 그 남편이 갑자기 동작이 빨라지면서 ‘난폭운전’을 하는 날이 일년에 딱 며칠 있으니, 바로 NBA농구경기가 일요일 낮 12시30분에 열리는 날이다. 레이커스의 광 팬인 남편은 그런 날이면 예배 끝나기 무섭게 우리를 짐짝처럼 태우고는 무섭게 다운타운을 질주하여 쏜살같이 집으로 달려오는데, 나는 그 때마다 사람마다 절대로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일도 얼마나 간절히 열망하느냐에 따라 해낼 수 있음을 실감하곤 한다.
지난 일요일이 바로 그런 날중 하루였다. 남편은 교회 가면서부터 비장한 모습이었다. “오늘이 사실상 결선이나 마찬가지야. 적진에서 먼저 1승을 해줘야 앞으로 유리하거든” 샌앤토니오 스퍼스와의 일전을 앞두고 필 잭슨 코치도 그만큼 걱정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날 사정이 조금 달라졌다. 바로 어린이주일이었던 까닭에, 어머님께서 교회 끝나고 손주 점심을 사주시겠다고 하셔서 모두 식당으로 향했던 것이다. 날씨가 엄청나게 더워져서인지 문전성시를 이룬 냉면집에서 시원한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 남편이 의외로 ‘안전운전’을 한다.
빨리 가서 농구 안보냐고 했더니 이럴 줄 알고 경기를 녹음시켜 두었다며 지금은 경기 중간이라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처음부터 보겠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내가 라이브로 응원해줘야 이기지, 녹화로 보는 날은 항상 진다”고 못내 불안해하였다.
집에 돌아와 괜히 딴청을 피우며 안절부절, 왔다갔다하는 남편, 집안에 폭풍전야와 같은 긴장이 감돈다. 자칫 잘못해 누구라도 먼저 알게된 경기결과를 발설하는 날이면…그러는 동안 남편 친구가 전화를 했다. 아마도 농구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었는지 남편은 버럭 화를 내면서 “경기내용을 말하면 수화기를 던져버리겠다”고 협박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얼마후, 아들이 나에게 ‘드디어 시작됐다’는 눈 사인을 보냈다. 이윽고 응원복인 레이커스 저지를 보라색으로 뒤집어 입은 남편이 앞에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정렬해놓고는 테입을 돌려 경기를 보기 시작했다.
집안은 TV에서 퍼져나오는 경기장의 함성과 남편의 괴성으로 열기를 띠기 시작했다. 남편은 농구를 볼 때면 항상 영어로 응원하고 영어로 야단을 치는데 아마 그래야 선수들이 알아듣겠거니 하는 모양이다.
한편 이런 녹화 관전은 나의 입장에서 보면 다소 유리한 면이 있다. 왜냐하면 광고나 쓸데없는 장면, 타임아웃 같은 부분을 빨리 돌려서 넘겨 뛰기 때문에 옆에서 고문당하는 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이고, 또한 평소보다 소리를 조금 덜 크게 지르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다 끝난 상황을 돌려보는 것이니 자기가 아무리 펄펄 뛰어 본들 이미 어떤 결과에 도달해 있으리라고 생각하면 김이 빠지는 모양이다.
남편의 탄식과 욕설이 잦아지더니 이날 레이커스는 졌다. ‘녹화로 보면 진다’는 예의 그 징크스 때문이었을까.
농구시즌이 끝나는 6월까지 이런 일요일이 몇 번 더 있으리라고 한다. 난폭운전을 당하고 빨리 경기가 끝나느냐, 조용히 돌아와 긴장된 순간을 보내다가 뒤늦게 당하느냐, 결국 ‘그것이 그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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