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사에 다니시던 아버지는 늘 누런 가죽 책가방을 가지고 다니셨다. 아버지의 책보 속엔 책과 함께 신문 교정용지가 한 뭉치씩 들어 있었다. 학교 다니는 아이가 넷씩이나 되니 공부할 때 연습종이로 쓰라고 챙겨 오시는 거였다. 한 면에는 기사가 있고 한 면은 백지이므로 백지를 이용하라고 가져오시는 것이었지만, 공부보다도 신문기사를 미리 보는 것이 더 즐거웠다. 인터넷이 없을 때이니 연예기사를 미리 보고 학교에 가서 말하면 그 가십을 들으려는 반 아이들에게 둘러싸이곤 했었다. 그것 때문에 공부는 못해도 인기가 좋았다.
주부의 일을 맡다보면 매일의 식품구입이 만만치 않은 일거리임을 알게 된다. 쌀이며 라면이며 과일까지 사오는 날은… 어떤 땐 열 단에 1불하는 파를 사고, 그 옆의 열무단도 세일이라면 덥석 집다보면 장보기가 노동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요즘 젊은 남성들은 그 부인들에게 눌려 살고 있는 듯 보인다. 어느 날 마켓에서 아내의 심부름으로 보이는 여성 생리용품 하나만 달랑 사 가지고 나가는 교회의 집사님을 만난 적이 있고, 앙증맞은 셀폰으로 “당근은… 감자는…” 하고 중계방송으로 아내의 지시를 받아가며 착실하게 장을 보는 남성도 보았다.
생전 남편과 장을 함께 보지 않는 나는, 생소하고 우스워 보였다. 나는 퇴근길에 미리 써 놓았던 장보기 리스트대로 후닥닥 사고 마는 형이어서, 오히려 남편이 옆에 있으면 거치적거려 불편해 하는 타입이다. 남편까지 따라와 시간낭비 할 일이 무언가…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다.
그 전날 한국 마켓을 다녀와 먹거리가 그득함에도 당장 쓸 물건이 필요하여 이웃의 미국 마켓에 가야 하는 일이 종종 생긴다. 음식 하다 말고… 달걀 한 알이 급하게 필요할 때가 있으니. 때론 귀찮기도 하나 이건 이것대로의 재미가 있다. 계산대 옆에 선정적 보도를 일삼는 옐로 저널을 뒤지는 재미가 보통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때는 시간을 벌기 위해 아무쪼록 길게 늘어선 계산대 앞에 줄을 선다. 가십성 주간지 ‘인콰이어러’ ‘스타’ ‘글로브’ 등이다. ‘피플’은 오히려 고상한 축에 속한다. 계산 순서의 양보를 거듭하면서 읽는다. 다 엽기적인 제목을 달고 있다.
예를 들면 “The passion of Mel!”이런 식이다. 요즘 한창 화제인 The passion of the Christ를 만든 멜깁슨의 가십을 다룬 기사이다. 일단 영어로 써진 것이면 한없이 느린 나의 ‘독해력’도 이때만은 빛을 발한다. 이리저리 건너뛰며 대강 읽어도 벌써 내용을 틀림없이 꿰는 수준이다. 한국 마켓에 가면 아는 사람들 만날까봐 체면 때문에 읽지 못하는 잡지이지만, 미국 마켓은 시선이 조금 자유로우니...
집에 돌아와 “알고 보니 멜 깁슨이 말이야, 부적절한 관계의 누구와 샌타모니카 아파트에서…” 어쩌구 할라치면… 남편은 “미국 마켓 같다 왔구나” 한다. 남편은 나의 이런 짓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나는 그만 둘 생각이 없다. 남에게까지 권할 수는 없어도, 이 취미생활을 위해 돈을 투자하지도 않으며, 어디까지나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의 여가선용이요, 영어공부에 도움이 된다고 굳게 믿고 있으니 말이다.
더욱이 ‘가십‘에 있어서 나의 관심사는 범세계적이다. 그러니 교회가 끝난 후의 친교시간은 내 팬(?)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내 지식을 한껏 전수하는 시간이다. 나의 주변엔 그걸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다. 인터넷에서 들은 소문에 나의 옐로 저널 지식이 합쳐지면, 그들이 열광하는 기사가 탄생하는 것이다.
지난 주일엔 예배를 마치고 교회에서 주는 공짜 점심을 먹고 나서, 작당을 하여 스타 벅스 에 갔다. 나의 책을 받은 어떤 분이 20불짜리 스타 벅스 티켓을 보내주셨다. 오랜만에 수다 떨기를 좋아하는 이들이 모였다. 종횡무진 떠들었다. 나중엔 너무 웃어서 입과 턱이 아플 정도로. 그러자 듣고 있던 남편의 동창이 슬그머니 한마디한다. 나를 4월의 여왕으로 임명한다나? 아무 것도 모르고 여왕이라니 좋았다.
“호호호 사람을 역시 잘 알아보시네~” 하자, 남편이 한소리 거든다. “니 무신 여왕인줄 아나?” “가십의 여왕이다” “좋아할 걸 좋아해라”
여왕이라고 다 좋은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사양해야 할… 좋다 만 여왕자리. ‘가십의 여왕’
이정아 <수필가>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