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폰
지난주 우리 식구는 패밀리 플랜으로 셀폰을 한 대씩 장만하였다. 남편과 나는 각기 따로 쓰고 있던 것을 합치는 대수롭지 않은 사건이었지만 처음 전화를 갖게된 아들은 한동안 난리도 아니었다.
사실은 작년부터 셀폰 타령하는 것을, 고등학교 들어가면 해주겠다, 올A를 받아오면 해주겠다 하며 들어주지 않았다. 한국서는 초등학생들도 다 갖고 있다지만 이곳 정서는 그렇지 않기에 일찍부터 아이에게 쓸데없는 문명의 이기를 갖춰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내 전화를 새로 해야할 시점이 되면서 생각해보니 열세살이면 그리 적은 나이도 아니고,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LA복판에 살면서, 또 요즘은 테러경보가 시시때때로 들려오기도 하는지라 하나 해주어도 좋을 것 같았다. 물론 학교에서는 절대 쓰지 않는 조건을 달았다.
그런데 막상 전화를 하러 대리점을 찾아가니 패밀리플랜은 있지만 전화기가 없다고 하였다. 공짜 전화기들이 요즘 품절이라 다음달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돈을 주고 사는 전화는 있었지만 한 대에 수백달러씩 하는 것을 살 이유가 없었고 그나마 좋은 전화기도 없었다.
그때부터 좀 기다리자고 한 것이 아들과 나에게 고문이 되었다. 아들은 매일매일 나만 보면 셀폰 이야기를 했다. 내 얼굴에 셀폰이라고 쓰여있는 것 같았다. 왜 아이들은 그런 것을 안 잊어먹는 것일까? 이래서 애들 앞에서는 절대로 즐거운 일을 미리 예고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한번은 먹을 것을 찾는 아들에게 장난삼아 “넌 하루종일 먹을 것만 생각하지?” 했다가 “아니, 난 먹을 거보다 셀폰 생각을 더 많이 해”라는 날카로운 응수에 부딪치기도 했다.
몇날 며칠이고 계속되는 등쌀에 살수가 있나. 이곳저곳 대리점들을 찾아다니던 중 지난 수요일, 새로 생긴 버라이즌 한인공인 딜러에서 리베이트로 전화기 세대를 공짜로 받고, 한달 100달러로 1,000분을 나눠 쓰는 2년 플랜을 계약했다. 그 때의 감격과 안도감이란! 더 좋은 것은 전화번호 3개를 나란히 받게된 것이다. 같은 지역번호, 같은 국번에 4040, 4041, 4042를 잇달아 받아왔다. 전화회사 직원도 이런 경우가 매우 드물다고 축하해 주었다. 외우기 좋은 4040을 놓고 남편과 나는 약간의 신경전을 벌였지만 언제나 그러하듯, 착하고 마음 약한 내가 양보하였다.
그날 저녁 우리집, 이런 날은 라면정식으로 때워도 되었을 것을, 흑미밥에 배추된장국 끓이고 꽁치를 구워 차린 내 식탁이 그렇게 찬밥신세가 된 적은 처음인 것 같다.
기계만 보면 모든 기능을 다 익혀서 사용해야만 하는 남편과 아들은 미처 충전을 다 하기도 전에 각자 전화를 들고 오만가지 입력과 셋업을 하느라 잠도 자지 않았다. 아들은 카메라폰으로 사진을 찍어 스크린에 올리고 전화벨 소리도 사람마다 다른 노래가 나오도록 셋업했을 뿐 아니라 아빠와 문자 메시지까지 주고 받으면서 어디서 다 찾아냈는지 이메일, 인터넷 기능까지 다운로드 받아놓았다. 애들은 정말 빠르다는걸 실감하였다.
그 와중에 발생한 약간의 열 받는 일. 셀폰에는 자주 쓰는 번호들을 스피드 다이얼로 저장하는 기능이 있다. 예를 들어 남편은 2번에 내 번호, 3번은 아들, 4번은 어머니, 이런 식으로 넣어둔다. 1번은 어느 전화나 보이스메일 체크업 하는 번호이므로 2번부터가 시작이다.
나는 무심코 아들에게 내가 몇번이냐고 물었다. 3번이란다. 어? 아빠를 내 앞에 했나? 싶어서 아빠는? 했더니 4번이란다. 그럼 할머니는, 하였더니 5번이란다.
그럼 2번은 누구야? 했더니 아들은 대답을 피하고 다른 이야기를 한다. 조금 있다가 또 물었다. 2번은? 또 딴소리를 한다. 정색을 하고 물었다. 2번에 누굴 넣었는데?
아들은 머쓱한 얼굴로 날 보더니 ‘걸프렌드’ 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충격과 흥분에 숨을 골라야했던 나, “너 걸프렌드 없잖아” 했더니 “남겨두는거야”(I’m saving it!)란다.
머시라고? ‘야, 너 이 전화 누가 해줬어, 니 걸프렌드가 전화 값 내준다니? 꼬추에 털도 안 난 녀석이 걸프렌드 같은 소리하네’ 속에서 온갖 아우성이 들끓었으나 간신히 참고 야유하는 것으로 엄마의 품위를 유지하였다.
사실은 마마보이가 아니라는 증거를 발견하여서 다행이었지만 한편으로 섭섭하고 괘씸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셀폰을 가졌으니 내년후년부터는 운전면허, 자동차 타령을 시작하지 않을까? 아들이 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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