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숙<수필가>
여보, 이리 좀 와봐.
왜요?
이리 가까이 와서 여기 좀 잘 들여다봐.
깊숙이 고개 숙인 남편의 정수리엔 땜질자국 마냥 둥글게 속살이 드러났다. 탈모부위는 얼추 봐서도 지름이 손가락 두 마디 정도는 족히 되어 보였다. 남편의 머리에서 말로만 듣던 원형탈모증을 확인하는 순간 미정은 명치끝이 뻐근하게 아팠다.
그러나 미정에겐 결코 낯선 통증이 아니다. 16년 전 김포공항에서 일 년만에 귀국한 그를 맞았을 때도 미정은 같은 통증을 느꼈었다. 아무리 가난한 유학생, 아니 고학생이라도 그렇지, 그의 머리는 도무지 결혼하러 들어 온 사람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분명 이발비 아끼려 유학생 중 누군가에게 머리를 맡긴 게 분명했다. 미정은 그때 새삼 ‘쥐 파먹은 듯 하다’는 표현을 실감했다. 요즘에야 멋 삼아 일부러도 그렇게 삐죽삐죽 머리칼을 세우지만 당시로서는 ‘가난’ 혹은 ‘정신이상’ 외에는 달리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었다.
그 머리가 미국서 최신 유행하는 헤어스타일인가 봐요.급기야 함께 공항에 나간 언니가 동생의 약혼자에게 농을 건넸지만 미정은 지금처럼 매양 명치끝이 아플 뿐이었다.
돈이 좀 들더라도 이발소 들려서 머리 좀 다듬고 오지 그랬어요. 민망해진 미정이 가벼운 핀잔을 주자 그렇게 금방 다시 손질하면 공들여 내 머리 깍아 준 학생이 상처받잖아요. 어차피 몇 주일만 버티면 한국에 나올텐데...
들쑥날쑥한 걸 정리하자 그의 머리는 형편없이 짧아졌다. 덕분에 결혼식 날 미정은 네 신랑 미국서 온 것 맞니? 군대에서 휴가 나온 게 아니고? 짓궂은 친구들의 놀림에 시달렸다.
미정의 남편, 최동혁은 착한 남자였다. 그럭저럭 밥이나 겨우 먹고사는 집의 5형제 중 3째인 그는 천성적으로 품성이 넉넉했다. 늘 앞뒤로 형제들에 치였지만 그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언제나 형들은 형이니까 귀하고 동생들은 또 동생이니 소중했다.
그는 어려서 집안형편이 어려워지면 형제들 중 제일 먼저 시골 할머니 집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가세가 나아져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촌티 나는 그는 형제들 틈에서 곧잘 미운 오리새끼가 됐다. 특히 흔히 기계총으로 불려지는 희긋희긋한 머리부스럼을 보고는 어린 동생들은 기겁을 했다.
지금도 저는 무의식중에 제 머리를 자주 쓸어보는 습관이 있어요. 솔직히 어릴 때 제 소원은 단 한가지뿐이었어요. 머리 기계총이 깨끗이 나아 그 냄새 고약한 약 안 바르고 친구들과 형제들에게 따돌림 안 받는 거였어요. 미정과 세 번째 데이트를 하던 날 그는 이야기 중간중간 제 머리를 쓰다듬으며 수줍어했다. 그때 미정은 그의 순박함이 말할 수 없이 좋았다.
제수씨, 솔직히 동혁이가 미국유학에다가 이렇게 예쁜 색시까지 얻게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그야말로 천지개벽이요, 산전벽해지요. 이제 와서 얘기지만 어릴 때 저 녀석이 얼마나 촌스러웠는지 아세요? 머리는 허구헌날 부스럼이 나있고... 신혼여행에서 갓 돌아온 미정이 시숙의 농담에 내심 언짢아하고 있는 중에도 동혁은 여전히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런 남편이 있기에 비록 가난하고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이지만 미정의 신혼은 따뜻했다. 요즘 세상에 흔해빠진 게 계란인데 어쩌다 아침상에 계란 후라이를 올리면 남편은 선뜻 노른자를 먹지 못했다. 처음엔 그에게 무슨 알러지가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얼마 후 그가 아내를 위해 일부러 노른자를 남겨둔다는 걸 알고는 미정은 가슴이 멍멍해졌다.
다시 말하지만 미정의 남편, 동혁은 착한 남자다. 그러나 사람이 너무 착하면 실속이 없는 법. 자신의 공부와 아르바이트만으로도 뻐근한데 그 많은 유학생들 뒷바라지하느라 그는 늘 바빴다. 주말에 학생들의 이사를 돕는 건 기본이고 심지어 남의 차 오일체인지까지도 해주었다.
어차피 제 실속 못 차릴 바에야 한인학생회장이라는 감투라도 쓸 것이지 그는 굳이 총무자리를 고수했다. 실제로 새로 유학 오는 학생들은 회장은 몰라도 최총무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생활도 결국 몇 년을 지탱하지 못했다. 어차피 돈이 있어 시작한 유학이 아니므로 아이가 태어나자 동혁은 결국 학업을 포기했다. 으레 서운해 할 법도 한데 그는 가족을 위한 선택인데 아쉬울 게 뭐냐며 오히려 미정을 다독였다.
다행스럽게도 동혁은 곧 현지 회사에 취직을 했다. 두말 할 나위도 없이 그는 누구보다도 성실한 직원이었다. 물론 회사의 궂은 일은 모두 그의 차지였다. 그래도 미정은 남편의 입으로 회사나 동료들에 대해 불만을 말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몇 년 전 불어닥친 불경기는 잔인했다. 그 바람에 성실한 그도 어쩔 수없이 감원의 불똥을 맞았다. 그후 동혁은 한국과의 무역을 시작했는데 처음 한두 해는 그럭저럭 수지를 맞추더니 한국 경제가 어려워지자 걸핏하면 물건값을 떼이곤 했다. 못 본 척 했지만 미정은 남편이 가끔 밤잠을 설치며 뒤척이는 걸 보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병원 한 번 가봐요. 무슨 치료법이 있겠죠. 말은 대수롭지 않게 했지만 아침부터 남편의 탈모증을 확인한 미정은 한없이 우울했다. 아침상을 차리는 손이 자꾸만 떨렸다.
안 된다니까요. 그 모자는 내가 제일 아끼는 거라구요.
그럼 다른 것 아무거나 아빠 좀 하나 빌려줘라.
아들 방에서 들리는 부자간 대화를 듣고 있자니 미정은 울컥 화가 치밀었다. 평생 누구에게도 큰소리 한 번 못 치는 남편이나 제 아빠 불쌍한 줄 모르고 딱딱거리는 아들이나 둘 다 원망스러웠다.
남편과 아들이 나간 후 미정은 서둘러 쇼핑몰로 차를 몰았다. 그리고는 고급 모자가게에 들러 남편을 위해 무려 200불이나 되는 비싼 모자를 샀다.
그날 밤 미정은 황제의 대관식을 치르듯 엄숙하게 남편의 머리에 모자를 씌웠다. 원형탈모증은 물론 기계총의 기억까지 함께 가려지기를 기원하며 뿌듯하게 남편의 모자를 바라보았다. 아니 모자가 아니라 찬란한 그의 왕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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