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지난 토요일 모처럼 문화생활을 좀 하였다.
다운타운의 현대미술관(MOCA)에서 미니멀리즘에 관한 좋은 전시회가 있다며 친구들이 불러준 것이다. 한 친구는 화가, 다른 친구는 아트에 조예가 깊은 컬렉터이므로 둘중 한사람을 따라다니기만 하여도 이것저것 귀동냥하면서 나의 문화수준을 한껏 올릴 수 있는 기회였다.
평소 착하게 살다보면 이렇게 좋은 구경 시켜주는 친구들도 만나게 되고,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간신히 얼마큼은 품위 유지도 하며 살 수 있게되는 것이다.
모카의 회원인 친구 덕분에 공짜로 전시회장에 들어섰다. 준비에 6년이나 걸렸다는 대단한 전시라 기대도 되었고, 정말 많이 인조이하였다.
20세기 미술사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미니멀리즘이 태동된 1958년부터 1968년까지 회화, 조각, 사진 등의 분야에서 40명의 대가들이 남긴 작품들을 한곳에 모은 쇼라 규모면에서도 방대하고 같은 주제 아래 다양한 표현들이 재미있었다.
예술의 문외한이 보더라도 미니멀리즘은 구조, 형태, 재료의 모든 면에서 단순성과 직선, 입체성과 공간성이 공통된 특징임을 알게 해주는 전시회였다.
말없이 감상하던 친구가 “우리 남편이 이 작품들 보면 또 사기라고 펄펄 뛰겠네”라고 말해 크게 웃었다. 좋아하는 작품을 사서 어울리는 공간에 거는 것이 취미인 그녀와 달리 남편은 항상 ‘아트는 사기’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하긴 대형 캔버스에 한가지 색만 칠해놓은 작품, 줄 하나만 그어놓은 작품, 겹겹이 포갠 거울, 나무토막을 일정한 패턴으로 쌓아놓은 것, 바닥에 깔아놓은 강철판 36개, 벽에 걸린 빈 액자도 작품이고, 길다란 형광등을 두개씩 붙여놓은 것도 대가의 작품이니, 사기라는 말이 나오기도 할 것 같았다.
그 전시회를 보고 나서 한 친구는 약속이 있어 떠나고, 남은 우리는 어디 가서 커피나 마실까 하다가 갑자기 카운티 뮤지엄(LACMA)으로 차를 돌렸다. 라크마 역시 회원인 친구가 그곳에서 커피도 마시고 전시회도 감상하자고 날 데려간 것이다.
하루에 뮤지엄을 두군데나, 오! 일년치 문화생활 한꺼번에 다 하네,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친구는 바로 뮤지엄 코앞에서 사는 내가 무척 좋겠다고 부러워했다. 언제든지 좋은 전시회 실컷 볼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라크마는 바로 내가 사는 파크 라브레아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위치에 있고, 회사에서도 무척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이웃이다. 그러나 정작 나는 라크마에 자주 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친구에게 부끄러워 말하지 못하였다. 그때, 문화생활을 즐기는 여유라는 것도 사실은 시간이 아니라 마음, 예술에 대한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크마에서는 20세기초 공연무대의상 전시회와 일본 미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가미사카 세카의 전시회를 둘러보았다.
무대의상 전시회에서는 에르테(Erte)라는 당대의 유명한 러시안 디자이너가 오페라와 발레 공연 출연자들을 위해 만든 화려한 의상들을 직접 보면서 믿을 수 없을 만큼 정교하고 아름다운 수공예 작품들에 탄성을 연발하였고, 일본관에서는 현대 일본 디자인 예술의 선구자였던 가미사카 세카의 작품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1940년대 이전에 이미 모던 디자인의 기초를 그릇, 천, 라커, 목판, 가구, 세라믹 등 생활의 모든 일상용품에 적용하였다는 사실이 매우 인상 깊었고, 솔직히 말하면 그것이 근대 한국과 일본의 문화수준 차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식민지와 전쟁을 겪느라 피폐해졌던 동안 일본은 서양예술과 접목한 독특한 동양예술을 안정적으로 발전시켜 나갔던 것이다. 하긴 라크마 내에 따로 지어진 일본관만 둘러보아도 얼마나 열등감이 느껴지는지 모른다.
가끔씩 부엌을 벗어나 근처에 있는 미술관을 찾아보는 주부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거기서 전혀 다른 나를 발견하게 되기도 하고, 평소보다 격조 있는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 자존감을 높이는 기회도 되기 때문이다. 아예 멤버로 조인해 연중 어느 때나 모든 쇼를 2인까지 무료로 관람할 자격을 얻으면 더욱 좋으리라. 모카는 일년 회비가 60달러, 라크마는 75달러면 그 외에도 많은 혜택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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