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린다, 그리고 자유한다.
봄빛이 완연한 요즘, 타운에는 중년 여성들의 미술전 2제가 열리고 있다. 존 식스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갖고 있는 김재경씨의 누드 드로잉전과 도산홀에서 열리고 있는 니나 정, 앤 김, 이나경씨, 10년 지기 화실친구 3인의 추상화전이다. 우연히 같은 시기에 전시회를 갖고 있는 이들은 모두가 10년 넘게 그림을 그려온 중년 여성들이다. 굳이 아마추어 화가와 프로작가를 경계짓는다면, 같은 그림을 10년, 20년 계속 그려도 결코 지루하지 않고 또 자세히 보아 그림마다 새로운 것이 보일 때 사람들은 프로작가라고 부르고 싶어한다. 전시회에 출품한 이들의 작품을 둘러보면, 각기 ‘같아 보이는’ 그림들이 15∼18점 가량 나란히 걸려 있다. 이제 프로 작가라 소개해도 될성싶은데 이들은 자신을 가정주부가 본업인 아마추어 화가, 미술애호가임을 고집한다. 여유가 있고 지혜로워 아름답다는 중년, 꿈틀거리는 열정을 화폭에 표출해 더욱더 아름다운 여성4인을 소개한다.
◇풍부한 상상력, 거침없는 여자, 김재경.
나는 오랫동안 글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살아왔다. 어느 날 내가 쓴 글에서 구속된 나를 보면서 실망했다. 얼마큼은 과장되었거나 혹은 미흡한 채로 진실에 미치지 못했고, 때로는 눈가림으로 진실을 수식하는데 나를 소비하고 있었다. 거짓된 시간에 대한 자책감으로 좌절에 빠졌을 때 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화폭 안에서 처음으로 자유한 나를 발견했다…
오는 9일까지 존 식스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는 김재경(47)씨가 전시회에 부치는 글이다.
김씨는 원래 신문기자, 다큐멘터리 방송작가 출신으로 글 쓰는 일이 직업이었던 사람이다. 10여년전 케이 백 객원기자라는 이름으로 본보에 기사를 쓰기도 했던 그녀는 결혼과 동시에 두 아이 키우며 남편 내조 확실히 하는 전업주부로 꽁꽁 숨어 지내더니 이번에 갑자기 개인전 초대장을 들고 나타난 것이다.
어느 날 자신이 쓴 글 속에서 구속된 나를 보면서 실망감이 밀려들었다는 그녀. 남들처럼 결혼해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는 모범생 같은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문득 환경에 의한 행복이 아닌, 내 속에 서있는 기쁨을 찾고 싶어져 중견화가 김소문씨의 화실을 두드리게 됐다.
이후 13년 동안 그림을 그리면서 화폭 안에서 ‘자유한 나’를 발견했다는 김씨는 가짜의 내가 아닌 진짜 나를 찾아가는 게 그림의 매력이라고 말한다.
이번 누드 드로잉전에 출품된 그녀의 작품들은 붓을 몇 번만 휘두르면 끝낼 수 있을 것처럼 단순하고 투박하지만 굵고 대담한 선, 강렬한 터치가 강인한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아름다운 인간의 육체, 중년 여인의 구부린 어깨와 넉넉한 허리, 대지를 딛고 우뚝 서있는 두 다리, 큼직한 발이 특이 그렇다.
모르는 사람의 발을 씻어 주면서 발이 참 거칠다는 생각을 했죠. 그 날 이후 인체에서 가장 사랑하는 부분이 ‘발’이 됐어요. 육체를 떠받치는 두 다리 아래, 넘어지지 않도록 설계된 넓적한 발이요. 거친 발, 치장하지 않은 발을 볼 때에 계산되지 않은 애정이 샘솟죠.
사람을 그리면서, 사람마다 다르다는 사실이 너무나 재미있다는 김씨는 캔버스 저편에 객관적으로 서있는 대상을 바라보면 자신의 내면에는 지진이 일어나고, 기쁨으로, 붓 잡은 손이 떨리는 느낌을 ‘내가 찾은 자유’라고 표현했다.
◇내적 에너지가 넘치고 넘치는 여자, 앤 김.
우리 세 명 10년 지기 친구죠. 동창보다 더 가까운 사이이에요. 또, 우리 모두 그림을 평생하고 싶은 생활의 일부로 느끼는 여자들이죠. 이번 전시회는 오랜 세월 끈질기게 그림과 함께 해온 우리들의 10년을 정리하는 의미가 있어요.
오는 4일까지 도산홀에서 3인전을 열고 있는 주인공들 중 최고참인 앤 김(53)씨는 항상 생각이 많고, 뭔가를 배우려는 의욕이 넘치는 사람이다. 꽃꽂이, 다도, 공예 등 해보지 않은 것이 없지만 항상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이 있었다.
얌전한 가정주부로 살림을 하면서 멋진 풍경을 볼 적마다 자기 표현의 욕구에 사로잡히곤 했다는 김씨는 1991년 9월 중견화가 강태호씨의 문하생으로 그림을 시작했다. 지금은 LA 한인타운으로 장소를 옮겼지만 강태호씨의 화실이 밸리에 자리잡고 있던 초창기, 겨우 두 세 시간 그림을 그리려고 라구나비치에서 1시간30분을 달려가도 피곤함은커녕 내면의 에너지를 분출하는 기쁨, 성취감에서 느껴지는 행복에 흐뭇했다.
삶에 대한 열정이 강해서인지, 김씨를 마주하면 결혼한 아들이 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활기찬 젊음이 가득하다. 곡선과 직선을 응용해 공간감과 입체감을 살린 그녀의 작품 또한 힘찬 생명력이 느껴진다. 넘치는 내적 에너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열정이 그림에 그대로 나타나서다.
그래도 막상 잠시나마 자기만의 시간을 갖기 시작했을 때 가족에게 눈치가 보였고 왠지 죄책감까지 느꼈다는 김씨는 아이들이 엄마의 생활을 존중해주고, 남편이 뒤에서 ‘잘한다, 잘한다’고 격려해주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내 인생의 어느 시기보다 그림을 그리는 지금이 좋다는 김씨는 그림을 통해 보너스로 얻은 색채감각을 실제 생활에 응용하는 센스 있는 주부다.
◇내 안의 또 다른 나와 만나는 여자, 니나 정.
그림을 그리면 내 자신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는 기분입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내가 그런 셈이었는데, 친구 덕분에 몰랐던 ‘나’를 찾았어요
내 안의 나와 대화하는 게 즐겁다는 니나 정(51)씨.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좋아하긴 했어도 자신이 그림을 그린다는 건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학부모 모임에서 알게된 동갑내기 친구 이나경씨가 우리 화실이나 나가볼까?라고 권유했을 때도 그냥 무덤덤했다.
워낙 말투가 어눌하고 자기 표현력이 부족해 자신의 의사를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게 힘든 성격이라는 정씨는 캔버스를 마주하면서 현실에 나타난 자신과는 전혀 다른 나를 만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주부들이 그렇죠. 오랫동안 남편과 아이들 속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에 인간관계 맺는 방법에 서툴고, 상대방의 의도를 읽고 대처하는 것도 힘들어요. 그런데 캔버스 앞에만 서면 말로는 그렇게 표현하기 힘든 생각이 저절로 옮겨지는 겁니다.
화실 친구들로부터 보기 드물게 감수성이 풍부한 여자라고 평가받는 정씨의 작품은 두 개의 공간으로 나뉘어져 있고, 하나의 매체가 떨어져 있는 두 공간을 연결하고 있다.
그냥 보면 텁텁한 유화물감을 붓에 칠해 캔버스에 쓱쓱 문지른 것 같지만, 떨어져 있는 개체를 중심으로 정씨 자신의 생각이 주입돼, 보는 사람에게 사물간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캔버스를 채워가면서 그토록 애먹었던 인간관계, 어렵기만 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게 너무나 쉬워졌다는 정씨. 이제 그림은 그녀에게 하나의 ‘일기’이고 ‘기도’다.
◇다시 잡은 붓으로 나를 가꾸는 여자, 이나경.
세 여성 중 유일하게 이나경(51)씨만 오랜 기간은 아니지만, 미술을 전공했다. 이화여대 서양화과를 2년 다니다가 미국 유학을 왔고, 결혼과 더불어 그림 그리기를 중단하고 그냥 아내로, 엄마로 살았다.
늘 그림을 다시 그리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지만, 마음뿐이었다. 연년생인 아이들을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하느라 자신은 까맣게 잊고 지내던 어느 날, 친구 니나 정씨를 꼬셔서 강태호씨 화실에 발을 디뎠다.
가정주부들은 늘 ‘뭔가 해야겠다’ ‘뭔가 하고 싶다’는 욕망을 갖고 살죠. 하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그 일을 시작하려는 경우 주눅부터 먼저 들어요. 나만 생각하는 게 아닐까. 가족에게 방해가 되진 않을까. 결혼 후 자존감을 잃어버렸기 때문이겠죠.
그렇게 용기를 내어 다시 잡은 붓은 그녀를 실망시켰다. 날렵하게 움직이던 손끝이 왜 그리 뻣뻣하기만 한지. 함께 화실을 찾은 친구에게 들킬까 민망스러웠다. 화실에서 열심히 배워도 실력이 향상되는 모습이 보이질 않아 머릿속만 복잡해질 무렵, 하나의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 날 따라 좀처럼 여운이 가시질 않아 저녁 준비를 하면서 부엌에 캔버스를 펼쳤어요. 한참을 캔버스만 쳐다보고 있자니, 큰 아이가 옆구리를 쿡 찌르며 한마디 던지네요. ‘엄마, 참 멋있어. 엄마가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는 모습이 자랑스러워.’ 그 순간, 자신감이 솟았어요. 그래, 내 자신을 위해 잘한 결정이다. 여기서 포기해선 안 돼지.
엄마가 아들에게 격려를 받은 것이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붓을 잡기 시작한 지 이제 10년. 그 동안의 갈증 때문인지 이씨의 작품은 자신감에 차있다. 자신이 꿈 꿔왔던 일은 결국 자신이 시작해야 한다는 것. 굳이 유명해지지 않아도 좋다. 성공적인 시작으로 자기 내면을 되돌아보고 자신감을 찾아가는 게 소중할 뿐이다. <하은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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