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라 최(피아니스트)
우연히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학부 때 같은 선생 문하에서 공부하던 선배의 연주회 광고를 보았다. 선배의 프로필 하단부에는 굵은 글씨체로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나에게 있어서 음악회는 하나의 의식이다. 연주자가 창출해 내는 소리를 통해서 작곡가의 철학을 청중과 같이 나누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더 높은 경지로의 의식세계를 체험하는 경건한 의식이다.
연주에 대한 그의 신념과 철학을 잘 대변하는 문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주를 들으러 오는 청중에게 자신의 신념을 미리 알림으로써 청중과의 교감을 높이려는 의지도 엿보였고, 또 한편으로는 ‘나에게 있어서 연주는 의식이다’라고 당당히 외치는 선배의 자신감이 느껴졌다. 또 다르게 해석을 하자면 나에게 있어서 연주는 하나의 경건한 의식이니 그에 동참할 각오가 돼 있는 자만이 참석을 하라는 외침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연주자들은 연주가 청중과 교감하는 의식이라는 생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 내가 아는 어떤 언니는 연주 스케줄이 잡히는 순간부터 헤어스타일은 어떻게 할건지, 어떤 드레스를 입고 어떤 구두를 신을 건지를 정하고, 한 달도 넘게 그 드레스와 구두를 방문 앞에 걸어두고 매일매일 그걸 쳐다보며 자신이 그 옷을 입고 무대에 서서 연주하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준비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연주자가 연주라는 자신만의 성스러운 의식을 거행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그래서 마음을 가다듬고 연습을 하는 동안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엄마는 신문에서 보았는지 아니면 주변에서 소문으로 들었는지, 누구누구는 엉덩이에 땀띠가 나다못해 진물이 나도록 연습을 해서 잘 앉지도 못한다더라는 얘기를 내 귀에 못이 박히도록 했었다. 그렇지만 다른 ‘연습괴담’에 비하면 엉덩이에 땀띠가 나는 것 정도는 명함도 못 내민다. 피아노 연습을 너무 많이 하다보니 지문이 없어졌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내 눈으로 보기 전까진 믿기 어렵지만), 평생 너무 피아노 앞에 앉아서 보낸 시간이 많다보니 엉덩이가 퍼지고 아랫배가 심하게 나온 이상 체형이 되었다는 사람도 있고, 너무 열심히 악보를 보다보니 눈이 나빠졌다는 사람은 오히려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찾기 쉽고, 손이 작아서 스스로 손가락 사이를 칼로 찢었다며 흉터를 보여주는 사람도 간간이 있다. 손가락 사이를 찢으면 상처가 아물면서 오히려 손가락 사이가 이전보다 덜 벌어진다니, 이처럼 미련한 일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한들, 스스로 칼을 들어 자신의 손을 찢는 아픔을 견디는 마음가짐마저 무어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연습괴담’은 피아니스트에게만 해당하는 얘기는 물론 아니다. 금관악기를 부는 남자들은 매일매일 수염의 길이와 면적을 일정하게 다듬느라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갑자기 수염이 길어지거나 수염을 싹 밀게 되면 입술 주변의 근육을 움직이는데 변화가 와서 입술이 쉬 부르트기 때문이란다. 바이얼린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바이얼린을 괴고 있는 왼쪽 턱 밑에 키스마크 같은 흉한 자국이 생기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고, 너무 턱을 이용해서 한 방향으로만 오랫동안 바이얼린을 괴고 있다보니 목뼈가 휘었다는 사람도 많다.
연주자는 연주를 앞두고 마음 편하게 연습에만 몰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틈틈이 자신의 프로필을 업데이트 해야 하며, 홍보용 사진을 찍어야 하고, 사진을 찍기 위해 머리를 하고 화장을 해야 하며, 드레스를 구입해야 하고, 드레스를 사러 다니는 동안 누구나 좀 더 살을 빼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어서, 다이어트에 운동까지 하게 된다. 게다가 연주회가 끝나고 리셉션 준비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면, 다른 생각 않고 집중해서 연습을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거의 도사의 경지에 이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게 준비해서 무대에 섰을 때, 보통 짧게는 20~30분, 길게는 70~80분이면 연주가 끝난다. 나의 경건한 의식을 청중과 교감하는 시간은 최고로 길게 잡아서 한시간 반 정도가 주어질 뿐인 것이다. 오랜 기도 끝에 성스러운 종교 의식을 마치고 영혼이 새롭게 태어나듯이, 연주 또한 연습을 동반한 오랜 준비기간 끝에 무대 위에서 청중과 함께 더 높은 의식세계의 체험으로 승화되는 하나의 의식이 될 수 있음에 깊이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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