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동심을 보냈던 섬마을 경기도 강화에 수녀병원이 하나 있었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산중턱에 위치한 그곳에 가면 맛있는 미제 과자나 가루우유를 찐 덩어리 우유도 얻어먹을 수 있어 좋았다. 초등학교 1~2학년 정도 때의 일이어서 기억이 자세하진 않지만 수녀병원 옆 성당에 가면 옷가지와 신발, 장난감도 받았던 것 같다. 물론 미사에 참석해야 했지만.
어쩌다 미군들을 만나면 초컬릿과 껌도 얻어먹는다. 구태여 6·25 전쟁을 들먹이지 않아도 멀지 않은 옛날에도 ‘기부 미 어 검’하며 미군들을 쫓아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코가 크고 파란 눈의 신기한 외국인 수녀들이 머물던 근사한 성당 옆에 부속건물로 붙어 있는 병원을 우리는 수녀병원이라고 불렀었다. 1960년대 중반쯤 됐을 텐데 결핵 검사를 위한 엑스레이도 찍어주고 결핵환자에게는 약도 줬다. 회충약도 먹어본 기억이 난다. 겁먹고 우는 아이들을 달래느라 과자와 덩어리 우유도 나눠주던 헌신적인 수녀들의 모습이 아물거린다.
이북서 피난 온 부모님의 억척 덕분에 강화에서 하나뿐인 사립 ‘합일’ 초등학교에 다닐 정도로 비교적 부유하게 자랐지만 주변에는 가난하게 살았던 친구들이 많았다. 천이나 새끼로 칭칭 동여맨 다떨어진 고무신을 신고 산을 넘어와 학교 앞에서 운동화로 갈아 신던 친구들의 모습이 낯설지 않았고 가방대신 천으로 둘둘 말아 등에 걸치고 고구마 점심을 싸들고 와 친구들의 계란 얹은 쌀밥 도시락과 바꿔 먹던 친구들의 기억도 난다. 산넘어(읍을 벗어난 지역) 친구집에 놀러 가면 장판도 없는 흙바닥 사랑방에 쪼그리고 앉아 다리를 걷어붙이고 필터 없는 담배를 끝까지 빨아 당기며 새끼를 꼬는, 초췌한 모습의 친구 아버지에게 인사를 하던 생각도 난다.
가난하던 시절 외국인 수녀들이 운영하던 수녀 병원은 질병과 가난에 찌든 촌마을 강화 어린이들의 건강과 동심을 지켜주던 정겨운 곳이었다.
본보가 월드비전과 공동으로 벌이는 ‘사랑의 빚 갚기-한가정 한 어린이 결연’ 캠페인 취재차 적도에 위치한 중앙아프리카 3개국을 돌아보며 못살던 시절 고향을 문득문득 떠올리곤 했다. 어려웠던 시절을 지내왔던 한인들이 이제는 못살고 헐벗는 나라를 돕겠다고 나선다는 사실에 조금은 어깨가 무거워졌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월드비전은 6·25 전쟁으로 온 국민이 실의에 빠져 신음하던 시절 미국인 선교사 밥 피얼스 목사와 한국의 한경직 목사가 전세계 수많은 후원자를 모아 가난과 고아, 질병에 시달리는 한국 어린이들을 도와주며 시작된 사설 구호기관이다. 한때 선명회라고 불려 통일교단이 아닌가 하는 오해도 받았던 월드비전은 한국을 돕기 위해 창설돼 이제는 북한을 비롯한 전세계 100개가 넘는 국가에서 어린이들에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질병과 가난으로부터 보호하는 구호 사업을 벌이고 있다. 전쟁이나 분쟁지역에서 활동하는 월드비전 관계자들이 매년 2~3명씩 반군이나 폭도들에게 피살될 정도로 월드비전은 구호가 필요한 곳이면 장소나 지역을 가리지 않고 달려간다.
오는 6월까지 계속될 ‘사랑의 빚 갚기 캠페인’은 우리가 받았던 온정을 되돌려 주자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6·25의 혹한기에 월드비전을 통해 받았던 외국인들의 온정을 이제는 가난한 나라 사람들에게 되돌려주자는 취지이다.
월드비전 통계에 따르면 한가정 한 어린이 결연을 맺고 매달 26달러로 제3세계 어린이를 돕는 한인들은 대략 1만여명이라고 했다. 통계를 좀더 살펴보면 대부분 후원자들이 중산층 이하라는 사실이 눈길을 끈다. 바꾸어 말한다면 호의호식하는 부자들 보다 빠듯한 살림으로 살아가는 한인들의 인심이 더 넉넉하다는 것이다.
한달 30달러로 아프리카 어린이 한명과 결연을 맺게되면 해당 어린이뿐아니라 형제 자매, 부모까지 또 더나아가서는 어린이가 살고 있는 지역 사회의 공공위생, 복지등 다양한 혜택이 주어진다.
새로운 100년을 시작하는 2004년은 한세기의 뿌리 깊은 이민 역사를 자랑하는 한인 사회가 세계 곳곳의 그늘진 곳에서 신음하는 제3세계 어린이들을 되돌아 보는, 넉넉하게 베푸는 한해가 됐으면 좋겠다.
김정섭
사회부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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