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가을이면 형제가 나란히 웨스트 포인트를 다니게 된다는 김종석·명희씨 부부가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 오른쪽부터 큰아들 레이먼드, 어머니 김명희씨, 아버지 김종석씨, 작은아들 라이언. <하은선 기자>
웨스트 포인트 학부모회(회장 김진문)에 따르면 현재 40명 가량의 남가주 출신 한인 사관생도들이 웨스트 포인트에 다닌다. 그 중, 2005년도 졸업하게 될 남가주 한인 ‘카우(Cow)’가 16명. 3학년을 지칭하는 ‘카우’는 사관학교에서만 통용되는 슬랭으로, 신입생은 플레비(Plebe), 2학년은 옐링(Yearling), 4학년은 퍼스티(Firstie)라고 부른다. 남가주에서 웨스트 포인트로 진학한 한인생도들의 숫자가 유난히 많기도 하지만, 이들 학부모간의 관계도 유별나게 돈독하다. 자녀들에게 위문품(?)을 함께 보내는 날이면, 걱정 반 자랑 반으로 이야기 보따리를 푸느라 누구 하나 자리를 뜨지 못할 정도. 사관생도 자녀를 키우는 맛은 어떨까. 두 아들을 웨스트 포인트(West Point)에 보낸 김종석·명희씨 가족을 만나봤다.
지난 토요일 오후 글렌데일의 조용한 주택 앞에 다다른 순간 운동복 차림의 김씨 부부와 마주쳤다. 봄방학을 맞아 집에 온 큰아들 레이먼드(21·김재필)와 함께 작은아들 라이언(18·김재원)의 야구시합을 관전하러 갔다가 집에 막 도착하던 차였다. 반짝반짝 윤이 날 정도로 청소를 해놓은 김씨의 집에 들어서니, 한쪽 벽면에 진열된 두 아들의 졸업연도 기준 2005학년도와 2008학년도 웨스트 포인트 입학허가서 액자들 위로 각종 훈장들이 눈에 띄었다.
레이먼드 할아버지가 원래 대령 출신이고 저는 ROTC 장교출신입니다. 삼촌은 미군에 복무했죠. 아이들이 쓴 에세이를 읽어보니, 둘 다 자신들이 군인의 혈통임을 자랑스럽게 느끼고 있었어요.
김종석씨가 3대 째 군인집안임을 설명하는 동안 레이먼드는 어느 새 제복으로 갈아입고 나타났고, 잠시 후 데일리뉴스 빅3 토너먼트에서 밴나이스 고교 야구팀을 꺾고 기분이 좋아 보이는 라이언(글렌데일 고교 야구팀 주장)이 자리를 함께 했다.
요즘 같이 어수선한 세상에 아들 둘이 군인의 길을 자원했는데 걱정되지 않느냐?고 어머니 김명희씨에게 묻자 가족과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가 졸업하면 5년간 의무적으로 군복무를 해야하는데 걱정이 왜 없겠어요. 그래도 아들의 선택이기에 믿는 거죠. 개인적으론 아들이 남자답게 커가서 좋아요.라고 답한다.
따지고 보면 어디 남자답기만 할뿐인가. ‘의무(Duty)’ ‘명예(Honor)’ ‘조국(Country)’이라는 숭고한 사명감을 뿌리 깊이 간직하고, 본인의 결정과 행동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질줄 아는 리더의 덕목을 갖춘 인격적 지도자로 양성되는 곳이 웨스트 포인트 아닌가. 국가가 막대한 돈을 투자해 사관생도들을 키워내는 202년 역사의 웨스트 포인트는 독특하고도 효율적인 리더십 훈련을 시키는 곳으로 유명한 학교다.
레이먼드가 고교에 진학하기 직전 김씨 부부는 두 아들과 함께 아이비리그 탐방을 떠난 게 진학준비의 전부라고 겸손해했다. 당시 이들 부부는 하버드, 예일, MIT 등에 이어 웨스트 포인트를 보여주면서 아들 중 하나라도 이 학교에 진학하면 좋겠다는 욕심이 가득했지만, 무턱대고 강요할 순 없는 진로 문제이기에 이런 학교가 있다는 것만 보여주는 데 그쳤다고 한다.
고3이 된 레이먼드가 나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을, 그리고, 국가를 더 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며 올해 떨어지면 내년이라도 반드시 웨스트 포인트에 가겠다는 굳은 결심을 비추자 너무나 기뻤다는 이들 부부. 그래도 장남인지라 행여 떨어지면 어쩌나 걱정이 돼 UC버클리를 포함한 몇몇 대학에 원서를 넣었고, 평점 4.33/ 4.5에 테니스와 풋볼 선수생활을 지낸 레이먼드는 한번에 철썩 붙어버렸다.
반면, 둘째 라이언은 일찌감치 진로를 결정, 웨스트 포인트만 지원했고 체계적인 수험 준비를 했다. 올해 조기입학허가를 받은 라이언의 경우를 자세히 살펴보면, 애덤 쉬프 하원의원에게 국회의 임명(Congressional Nomination) 추천을 받은 라이언은 평점 4.25/ 4.5, SAT 1,400점을 받았고, 현재 글렌데일 고교 3학년 대표이며 보이스카웃, 보이스 주정부 사절(Boys State Delegate) 등의 커뮤니티 활동에 참가했다.
체력검사결과는 왕복달리기 58초, 엎드려 팔굽혀펴기 2분83회, 턱걸이 23회, 무릎 꿇고 농구공 넣기 최장80피트 등을 기록했으며, 태권도 2단에 4학년 때부터 야구선수생활을 시작해 글렌데일 고교 야구팀 캡틴으로 외야수를 맡고 있다.
레이먼드와 라이언은 스포츠를 좋아한다. 아들을 스포츠맨으로 키운 부모라면, 아버지의 관심과 배려가 얼마나 중요한지 짐작할 것이다. 어릴 적부터 야구, 테니스, 풋볼, 태권도 등 운동을 시키려면 아버지가 시합 시간에 맞춰 픽업을 해야하는 건 물론 경기응원자, 연습상대가 되어 온 신경을 아들에게 쏟아야한다. 한미은행에 다니는 어머니가 아들의 인성교육과 학업 성취도에 중점을 두어 교육을 시켰다면, 자영업을 하는 아버지는 아들 둘의 체력 단련을 책임진 셈이다.
부모의 권유로 무턱대고 입학을 결정했다가는 사관생도가 되기도 전에 좌절된다고 강조하는 김씨 부부는 예비생도(Pre-Cadet)는 입학하기 전 ‘R-Day’(등록일)에 아이젠하워홀에 소집돼 머리를 깎고 군복으로 갈아입은 후 뜨거운 여름철 6주 동안 기본훈련을 받는다고 밝혔다. 말이 기본훈련이지 실상 ‘지옥훈련’에 가까운데, 훈련이 끝나는 날 완전 무장한 채로 15마일을 뛰어들어와야 ‘사관생도’(Cadet)로 겨우 인정을 받고 8월 중순 ‘A-Day’(입학식)에 참석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사관생도의 생활
웨스트포인트는 입학심사기준도 다르지만, 재학생 평가기준도 다르다. 학업성취도 55%, 군사훈련 30%, 체력단련 15%로 점수를 매기고 리더십 훈련도 중시되며 스포츠도 만능이 돼야 졸업이 가능하다.
신입생 시절은 아침5시에 기상해도 시간이 부족할 정도. 전체 점호에 앞서 신문 브리핑 등 상급생에게 보고할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레이먼드처럼 3학년이 되면 오전6시께 일어나 제복을 갖춰 입고 보고를 받기만 하면 되고 괜한 기압을 받는 몸 고생도 줄어든다.
6시40분 점호가 끝나면 4,000명의 생도들이 함께 아침을 먹고, 오전7시35분 수업 시작. 오후4시 수업이 끝나면, 각자 2시간 가량 럭비, 핸드볼, 수영, 풋볼 연습을 한다. 매주 토요일 실시되는 스포츠 경기에 대비한 개인 연습시간이다. 그리고 밤11시30분 취침나팔소리와 함께 일괄적으로 소등을 하지만, 대부분의 생도들이 새벽2시까지 책상 앞에 앉아있다.
웨스트 포인트에는 해마다 1,200명이 입학하는데, 그 중 여성은 약 15%정도. 레이먼드와 같은 3학년에 재학중인 남가주 출신 한인 여자생도는 린 실비아 이양과 제니 최양, 2명이 있다.
사관생도에게 3학년 진급은 통과의례를 거치는 중요한 시기다. ‘카우’가 되면 대대적인 선서식을 거행하는데 ‘의무, 명예, 국가’라는 구호 아래 젊음과 혈기로, 사랑과 충성으로 한 인간이 바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바칠 것을 맹세하게 된다. 2학년까지는 중도 포기 또는 하차를 해도 상관없지만, 일단 선서를 하고 나면 의무사항이 뒤따른다. 4년 무료교육에 매월 적지 않은 용돈을 받는 생도들이므로, 중도 탈락할 경우 여태껏 자신에게 투자된 비용을 전액 토해내든지 4년간 일반사병으로 미군 복무를 해야한다.
사관생도는 거짓을 말하지 않으며, 부정 행위나 도둑질을 하지 않으며, 또한 그러한 행위를 하는 자를 용인하지도 않는다.
웨스트 포인트의 리더십 훈련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제도는 명예 제도(honor system)다. 앞서 언급한 것이 명예 제도의 최저 기준이며 이를 위반하면 거의 퇴교 처리된다. 웨스트 포인트 내 모든 시험은 감독이 없다. 만약 부정행위를 할 경우 옆에 있던 생도가 보고를 해야한다.
함께 생활하는 생도의 비행을 고자질해야할 경우, 미안함이나 주저함이 없는가라고 묻자 레이먼드는 주저함이 있다면 자신의 판단이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 생도들은 입학과 동시에 간부 후보생으로 인정받고 졸업 후 소위로 임관해 지휘관이 됩니다. 팀워크, 지휘력, 문제 해결력과 책임, 권한의 문제, 관리능력 배양이 웨스트 포인트에서 배우는 리더의 조건이지만, 또 하나의 가치가 본인의 결정과 행동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질줄 아는 도덕적 덕목을 갖추는 것이라고 밝혔다.
현재 국제 정치(International Relations)를 전공하는 레이먼드는 웨스트 포인트 출신 중에서 맥아더 장군을 가장 존경하며 앞으로 워싱턴DC에서 일하고 싶은 포부를 지니고 있다.
<하은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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