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마라톤
마라톤이 나와 관계가 있으리라곤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올해 마라톤은 두 번이나 나를 불러내었다. 마라톤 코스가 바로 우리집 앞을 지나게 되기도 하였지만, 올해 우리 아들이 자전거 마라톤에 나갔고, 우리 교회에서도 출전했기 때문이었다.
아들이 속해있는 보이스카웃 부대는 매년 마라톤 바이크 투어에 참가하고 있다. 자전거를 타고 22마일 달리는 바이크 투어는 진짜 마라톤이 시작되기 전인 새벽 6시에 출발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새벽 5시까지 3가와 버몬트에 있는 랄프스 파킹랏에 집결하여 출발지인 USC를 향해 떠나기로 되었다.
무거운 자전거를 싣고 꼭두새벽에 아이를 데려가는 일 같은 것은 당연히 아빠가 해야하므로 나는 간신히 눈만 뜨고 “잘 하고 와라” 등 두드려 보냈지만, 아이가 열심히 달려 집 앞을 지나가는 시간에도 잠만 자고 있을 수는 없었다. 비몽사몽 세수도 못한 채 7시에 맞춰 남편과 함께 6가와 번사이드, 19마일 지점에 나가 서서 아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올해 바이크 투어에는 1만5,000명이 참가했다더니 과연 어마어마한 자전거 인파가 정신없이 지나갔다. 얼마나 많이들 쉴 새 없이 몰려오는지 겁날 정도의 자전거 행렬이었다.
그런데 자전거 마라톤은 기록이나 우승과 관계없는 행사이므로 대부분 즐기기 위해 나온 것 같았다. 부부끼리, 친구끼리, 혹은 부모자녀가 함께 페달 2개 달린 2인승 자전거를 타고 가는 모습도 많이 보았고, 자전거 뒤에 유모차를 매달고 아기와 함께 달리는 사람, 자전거 앞에 매단 장바구니에 갓난아기를 넣은 채 달리는 사람도 볼 수 있었다.
드디어 30분쯤 기다리니 아들아이가 오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는 ‘GO! JUSTIN’ 이라고 쓴 플래카드를 흔들며 열렬히 소리지르고 환영하였다. 아들은 “나 한번도 안 쉬었어”라고 자랑스럽게 소리치며 금방 사라져갔다. 5초도 안 걸린 환영행사를 위하여 40분 정도 아침볕을 받으며 서있었더니 오, 노! 그 사이에 얼굴이 발갛게 그을렀지 뭔가!
낮12시에 다시 한번 같은 지점에 나갔다. ‘사랑의 달리기’ 모금행사를 하는 교회팀과 목사님을 격려하기 위해 소시적 미술실력을 발휘해 큼직한 보드에 응원문구를 색색가지로 그려 들고 나갔다.
그런데 같은 지점이었지만 풍경은 완전히 달랐다. 일단 길바닥은 사람들이 마시고 버린 일회용 물컵들과 물병, 쓰레기로 하얗게 덮여있었다. 그리고 마라톤 주자들은 모두들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지나갔다. 그 지점이 19마일 지점이니, 전문가들에 따르면 가장 체력의 한계를 느끼는 지점이다. 또 날씨가 이날 갑자기 한여름처럼 더워진 바람에 사람들은 모두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고, 뛴다기보다 뛰고 싶지만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끌면서 걷고 있었다.
사람구경이 이렇게 재미있는지 나는 그날 처음 알았다. 사람 많은데 가는 걸 질색하는 나였지만 마라톤 구경만큼은 정말 ‘장관’이었다. 2만4,000명이 출전했다고 하더니 과연 대단한 인파였다. 1시간반 서있는 동안 내 앞을 지나간 수천명의 모습이 얼마나 각양각색이었던지 그 오랜 시간이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
혼자 뛰는 사람, 친구나 가족과 뛰는 사람, 전화하며 뛰는 사람, 음악 들으며 뛰는 사람, 성조기 들고 뛰는 사람, 웃통 벗고 뛰는 사람, 맨발의 청춘, 어린이, 노인, 아저씨, 아줌마, 학생, 불구자, 백인, 흑인, 아시안… 그렇게 다양한 인간군상이, 그렇게 다양한 복장과 모습으로 뛰는 모습은 뭐랄까, 벅차는 감격,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모두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리는 광경이 믿을 수 없는 일치감을 선사하는 것이었다. 미국에 살면서 마라톤 참가는 못하더라도 반드시 한번은 구경해 보아야할 이벤트라고 느껴졌다.
한인들의 모습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우리는 KART, 그리피스팍 러너스, 동달모(동부달리기모임) 같은 유니폼을 입고 뛰는 사람을 볼 때마다 힘내라고 응원해 주었다.
목사님 일행은 예정시간을 훌쩍 넘긴 1시20분이 되어서야 지나갔다. 우리는 환호하고 플래카드를 흔들며 완주하시라고 소리질렀다. 역시 5초도 안 걸린 환영행사를 위하여 1시간반을 땡볕에 서 있었던 것이다.
남편은 올해 마라톤에 출전하려 했으나 출장 스케줄이 겹치는 바람에 신청하지 못한 것을 몹시 아쉬워했다. 내년에 자기가 출전하면 날더러 꼭 여기 나와서 이렇게 똑같이 손을 흔들어 달라고 했다. 갑자기 마라톤이 싫어진다. 더 괴로운 것은 “초보가 풀코스 완주를 하려면 5~6시간은 잡아야 하는데, 뛰다가 배고프면 어떡하지”를 지금부터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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