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라 최(피아니스트)
한국에서 방학차 놀러 온 친구의 소원이 새로 문을 연 디즈니 홀에서 좋은 컨서트를 하나 듣는 것이란다. 스케줄을 보면서 같이 가고 싶은 컨서트를 찾는데, 개관 첫 해를 맞아 기라성 같은 음악가들의 연주로 즐비한 이번 시즌에 딱 하나의 컨서트를 고른다는 건 그리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 사람 연주는 듣고 싶지만, 곡목이 마음에 안 드는걸’식의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서 결국 피아니스트 라두 루푸가 연주하는 모짜르트 협주곡 23번, 가장조를 골랐다. 평소에 너무나 좋아하는 곡인데다가 피아니스트 라두 루푸가 연주를 한다니 놓치고 싶지 않은 연주였다.
지난 주말 저녁, 부슬부슬 내리는 비로 반짝이는 길을 운전해서 디즈니 홀에 도착했다. 새로 지은 건물이라 주차장도 밝고 쾌적했고, 모든 것이 다 깨끗해서 좋았다. 지하 주차장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컨서트 홀로 올라가는 길은 케네디 센터를 생각나게 하는 디자인이었다.
그 날의 프로그램은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으로 연주가 시작되었고, 베르그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세 곡, 인터미션, 모짜르트 피아노 협주곡, 그리고 마지막으로 요한 슈트라우스 주니어의 월츠가 연주되었다. 보통 서곡을 하나 연주한 후 협주곡이 연주되고, 인터미션 후에 교향곡으로 끝을 맺는 연주와는 좀 다른 특이한 프로그램이라 생각되었다. 프로그램 노우트를 읽어보니, 지휘자 프란츠 베슬러-뫼스트가 오스트리아 출신이라 그런지 모두 오스트리아 출신 작곡가들의 곡으로 편성한 프로그램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미완성 교향곡이 시작하면서 첼로가 첫 주제를 연주할 때부터 괜스리 콧잔등이 시큰해오기 시작했다. 따스하고 섬세하기 이를데 없는 오케스트라의 음색은 많은 부분 디즈니 홀의 뛰어난 음향 때문이겠지만, 그것을 다듬어서 자신이 원하는 색을 더함도 덜함도 없이 뽑아내는 지휘자의 뛰어난 역량이 처음부터 돋보였다. 런던 필 상임과 취리히 오페라 감독을 거쳐서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뮤직 디렉터인 지휘자가 만들어내는 독일풍의 깔끔하고 정돈된 연주가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미완성 교향곡은 항상 1악장만 듣고 말았었는데, 2악장을 제대로 들어본 것도 좋은 경험이었다.
베르그의 연주 또한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연주였고, 그 후에 있을 라두 루푸의 모짜르트 연주를 기대하며 인터미션 동안 잠시 나갔다가 들어오니 어느 새 무대에 기다란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나와 있었다. 그리고 라두 루푸가 연주할 때는 항상 그렇듯이, 피아노 벤치 대신 오케스트라 단원이 앉는 등받이가 달린 의자가 피아노 앞에 놓여있었다. 관객들이 모두 착석하고 불이 꺼진 후 성큼성큼 걸어나온 라두 루푸는 간단히 객석을 향해 목례한 후 의자 등받이에 등을 붙이고 앉았다. 우리가 앉은 자리는 마치 피아니스트의 오른쪽 옆에 높은 의자를 놓고 앉아서 연주를 지켜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그렇게 가까이에서 핑거링과 페달링까지 다 볼 수 있었지만, 눈으로 보면서도 그가 만들어내는 음색과 톤이 믿어지지 않았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쉬운 곡을 연주하는 듯한 그의 태도와 내 귀를 통해 심장으로 전달되는 그의 진솔한 음악은 어딘가 매치되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
이윽고 가장 큰 기대로 가슴 설레이며 기다리던 2악장이 시작되었고, 첫 소절을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를 듣다가 감격에 겨워서 눈물이 핑 돌았다. 그 순간만큼은 너무나 행복했다. 피아노를 가르쳐주신 부모님이 감사했고, 그래서 그가 만들어내는 피아노 소리와 연주에 눈물이 날만큼 큰 감격을 느낄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런데, 주말을 맞아 한껏 멋을 내고 연주회장을 찾은 LA의 관객들에게 그 눈물 날만큼 감격스러운 연주는 조금 너무 길었던가 보다. 후반부가 되면서 여기 저기서 기침과 재채기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아무도 감추지 않고 ‘에에에취이~’하고 큰 소리로 재채기들을 하기 시작했다. 2악장 끝 부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비밀스러운 소리로 연주를 들려주던 라두 루푸의 소리가 무참하리만큼 많은 사람들의 기침과 재채기 소리에 파묻혀 버렸다.
얼마나 내가 미안하고, 화가 나고, 속상했던지 말로 잘 표현이 안 된다. 지금까지도 그 때 일을 생각하면 분노로 얼굴이 붉어진다. 유럽이나 동부의 연주장에서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텐데, 싶은 생각이 드는 건 내가 LA에 살면서 갖고 있는 편견인가. 그 순간 이후 디즈니 홀이란 LA의 클래식 음악팬들에게는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볼티모어 심포니의 데이빗 진먼 지휘자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화가는 흰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고, 음악가는 정적 속에 그림을 그린다고. 그렇게 훌륭한 홀을 방문한 관객들은 음악가들이 최선의 음악을 창조해 낼 수 있도록 침묵을 지키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이며 책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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