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이 한인을 ‘봉’으로 여긴다면
정태수 <본보 편집국 부국장>
세월 한번 빠르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미주한인 이민100년을 아쉬워하고 밝아오는 새로운 100년을 반기는 모임들이 꼬리를 물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2월 하고도 중순 초입이다.
가는 100년과 오는 100년이 맞닿은 징검다리 시간대에 여기저기 모임에서 쏟아진 말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개중 하나,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했던 말은 이것이다. 저마다 먹고살기에 바빴던, 그래서 마음은 있어도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는 데 인색했던 지난 100년의 자화상을 이제는 떨쳐버리자는 다짐이다. 그리고 서로 돕는 한인사회를 만들자는 다짐이다.
샌프란시스코 한인회·샌프란시스코 한인 상공회의소·이스트베이 한인 상공회의소 등 각종 단체들의 송년모임이나 새해모임에서도 표현만 달리했을 뿐 이같은 다짐들은 어김없이 이어졌다. 참으로 멋진 풍경이다. 생판 모르는 사람끼리도 손을 맞잡고 도움을 주고받는 일이 허다한 마당에 같은 한인끼리 서로 돕는다는 건 새삼 군더더기를 붙일 필요도 없는 당연지사다. 세상만사가 뜻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다짐 자체만 해도 결코 가볍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베이지역 한인사회의 실상은 과연 어떤가.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최근에 접한 몇가지 소식을 보면 꼭 한인사회에 정이 넘쳐흐른다고 볼 수만은 없는 것 같다. 특히 변호사·의사 등 소위 ‘잘나가는 사람들’이 이래저래 고통을 호소하는 한인들을 성심껏 대해주기는커녕 ‘봉’으로 여기고 ‘물이나 먹인다’는 하소연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다.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면서 그중 두가지 사연만 대충 살펴보자.
오클랜드에서 음식점을 하는 A씨는 지난해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한인이 운영하는 인근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한인행사가 열릴 때면 병원장이 자원봉사에 나서기도 해 철석같이 믿고 그 병원을 찾았다는 게 A씨의 설명이다. 그런데 겉으로 알려진 명성과 달리 치료를 건성으로 해 다리는 다리대로 낫지 않고 보험마저 엉터리로 처리해 덤터기 골치덩이까지 떠안았다며 같은 한인이라고 믿었다가 다리만 망가졌다고 분을 삭이지 못한 채 (밖으로 떠들어봤자) 나라망신 한인망신이 될 것 같아 그동안 조용하게 처리하려 했지만 하는 짓이 괘씸하고 나같은 피해자들이 여러명이나 돼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문제를 삼겠다고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혔다는 또다른 피해사례의 주인공은 호텔을 운영하는 B씨. 그는 객실 내 설치물을 둘러싸고 관리회사측과 법적 분쟁을 빚게 되자 산호세의 어느 한인변호사에게 사건수임을 의뢰했다고 한다. B씨가 그 변호사를 찾아간 이유 역시 A씨가 한인병원 문을 두드린 것과 마찬가지로 기왕이면 한인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B씨에게 되돌아온 것도 허탈과 배신감뿐이었다. 일례로 믿고 맡긴 한인 변호사는 이 사건을 제대로 처리조차 하지 못했으면서 36시간동안 일했다고 엄청난 수수료를 청구하는 등 횡포를 부린 반면 참다못해 새로 선임한 미국인(백인) 변호사는 3시간만에 깔끔하게 해결하고 그에 해당하는 수수료만 받아갔다는 게 B씨의 설명이다.
필자 역시 기왕이면 한인 혹은 한인 관련 뉴스에 관한 한 좋은 것은 크게 나쁜 것은 되도록 작게라는 생각에서 피해자들이 거품을 물고 토해낸 주장 가운데 너무 심하다싶은 부분을 몇 술 덜어내고 남은 것마저 너무 꼴사납지 않게 나름대로 다듬어서, 게다가 문제인물의 이름까지 무작위 알파벳속에 가려놓은 채 얘기를 전개하고 있지만 이를 두고 원래 피해자들은 좀 과장하기 마련이라는 식으로 깔아뭉갤 수 있을까. 한인이 한인에게 당했다는 주장이나 하소연이 이밖에도 심심찮게 들여오는 걸 보면 결코 그렇게 넘길 일이 아닌 듯하다.
특히 피해사례들이 대부분 소위 잘나가는 사람들이 그 잘난 영어실력이나 기타 알량한 지식을 무기로 멋모르는 한인들을 골탕먹였다는 것이어서 더욱 문제다. 한인이라고 믿고 찾아온 한인에게 고맙다고 허리를 낮추고 손을 내밀어 도움을 주지는 못할망정 영어도 서툴고 물정도 어둡다는 걸 역이용해 덤터기를 씌우는 행위가 더 이상 반복돼서는 곤란하다. 한인이 한인을 ‘봉’으로 여기는데 남들이 한인사회를 존중해줄 리 없다. 지난 연말부터 최근까지 각종 모임에서 끊임없이 이어진 ‘서로돕는 한인사회’ 건설은 거창한 구호나 다짐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고 우리끼리 뒤통수치는 고약한 행태부터 줄여나가는 것이 첩경이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