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링크’의 라운지 전경. 유러피안 복고풍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현, 타운 바 중 특히 젊은 손님들이 많다.
금요일 밤, ‘블링크’의 바를 찾은 미셸 윤(왼쪽), 샨 유 커플. 칙칙한 덴 회식 장소지, 데이트 코스는 아니다는 이들은 주중 3∼4일은 ‘쿨’한 바에서 무드를 즐긴다.
’바(bar)=분위기’다. 달리 말하면 폼이다. 폼이 나쁘나? 아니다.
종이담배 피우는 사람들은 시가 애호가들을 ‘뻐끔뻐끔 흉내만 내는 겉담배’라며 폄하하기도 하지만 그들이 시가를 고집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엽궐련 특유의 향, 손가락 사이에서 결코 가볍지 않은 존재감, 그리고 금속이나 플라스틱 라이터가 아니라 나무 성냥으로 불을 그어 붙이는 스타일까지-.
이른바 ‘바’의 시대다. 젊은이들은 주점에서 말술에 취하기보다, 바에서 분위기와 멋에 젖는다. 젊은 남자만이 아니다. 소주에 속 부대끼고, 겁 모르는 청춘들이 왠지 겸연쩍어진 중년들, 원피스 차려입고 우아하게 한잔 기울이고 싶은 여자들이 바를 찾는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중경삼림’(Chungking Express)에서 실연한 금성무가 갈지자걸음으로 찾아간 곳, ‘지금부터 이곳에 첫 번째로 들어오는 여자를 사랑하겠다’고 독백하던 곳, 그 때 선글라스를 끼고 나타난 금발의 여인, 임청하.
최근 2∼3년 간 타운의 밤 문화는 소주방 전성기였다. 70∼80년대 종로 뒷골목을 재현한 업소들이 거리 하나를 접수할 정도였다. 뚝딱뚝딱 망치소리가 막차를 탈 즈음, 소리소문 없이 바들이 생겨났다. 일찌감치 바를 차린 곳도 있고, 수지 타산이 안 맞아 바만 철수한 업소도 있지만 요즘은 ‘제대로 하는’ 바들이 부쩍 느는 추세다.
바비 런던, 반줄, 블링크, 모스, 아가씨와 건달들, 로젠 브루어리, 블리스, 블루… 여기에 대강이라도 바를 갖춘 곳까지 합치면 열 댓 개가 넘는다.
’블링크’, ‘아미’ 등을 설계한 인테리어 디자이너 영 리씨는 4∼5년 전 한국을 휩쓴 바 문화가 타운의 새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다며 우아함과 쿨함, 복고와 현대, 동양과 서양의 조화가 요즘 바의 특징이라고 말한다.
술을 즐기지만 취하도록 마시지 않고, 칙칙한 덴 회식할 때나 간다는 ‘바 피플’들. 이번 발렌타인 데이엔 외로우면 외로운 대로, 달콤하면 달콤한 대로 타운의 괜찮은 바에서 ‘쿨’해보는 게 어떨까.
사귄 지 1년 된 커플 샨 유(22), 미셸 윤(24)씨. 바는 이들이 가장 즐겨 찾는 데이트 장소다. 주중 3∼4일은 찾는데 이유도 군살 한 점 없이 날렵하다. 우선 소주는 체질상 못 마신다. 둘째, 편하다. 셋째, ‘물’ 좋고 분위기 있다. 넷째, 또래 친구들이 거의 바 취향이다.
미셸 윤씨는 칙칙한 덴 회식 장소지, 데이트 코스는 아니다라고 잘라 말한다. 샨 유씨는 테이블은 마주 보는데, 바는 연인끼리 나란히 앉아 기분 좋다며 옆에서 따라주며 마시다 보면 스킨십도 하고…라며 능청이다.
다른 데보다 돈 많이 안 드느냐고 물었다. 이들이 정의하는 술집은, 맛도 맛이지만 분위기와 인테리어다. 너무 비싸지 않으면서 분위기에 값하면 돈이 아깝지 않다며 취하도록 술을 마시기보다 술과 음식, 무드를 고루 즐긴다는 이들 커플은 지난 번 절반쯤 남아 맡겨뒀던 보드카를 시켰다.
옷가게를 운영하는 위키 김(30)씨도 주중 3∼4일은 바를 찾는 단골이다. 예전엔 소주방과 호프집을 애용했지만, 요즘은 싱글인 친구들이 바를 좋아해 자연스럽게 바 취향으로 바뀌었다.
김씨는 바는 친구 한두 명과 편하게, 더 깊은 얘기를 나눌 수 있는 매력이 있다며 돈 있으면 양주, 없으면 맥주 마신다며 주종은 개의치 않는다는 투다.
변호사 제임스 김(34)씨도 ‘한 분위기’하는 형이다. 주중 2∼3일씩 바에 오고, 한번 올 때 200달러쯤 쓴다는 그는 분위기 쿨하고, 남에게 한 턱 쏠 때도 폼 난다며 바 예찬론을 편다.
비즈니스를 하는 이모(26·남)씨는 목적에 따라 장소 구분이 확실한 경우. 남자친구 2∼3명과 같이 와서 여자 바텐더와 얘기하며 스트레스 푼다는 그는 여자와 데이트할 땐 식당 가서 밥 먹고 영화관 가고, 룸살롱은 사업 때문에 간다고 한다. 바텐더가 남자라면 지금처럼 자주 오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그의 말은 남자의 솔직한 심리라는 결론이다. 실제로 바에는 여자보다 남자가 많았고, 여러 남자들이 비슷한 대답을 했기 때문이다.
길다란 바, 그리고 깍두기처럼 독립적으로 줄지어 놓인 스툴. 단출한 안주와 글래스 하나. 어딘가 고독하고 사색적이며, 뜻밖의 인연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은 바의 풍경은 이런 사연을 품고 있었던 거다.
이처럼 ‘바’의 다른 말은 ‘분위기’다. 분위기에 민감하다보니 같은 바라도 성격이 천차만별이다. 손님도 중년층인 곳, 20대 중반∼30대 후반이 가는 곳 다르고 조용한 곳, 왁자한 곳, 음악이 재즈인 곳, R&B인 곳, 술의 주종이 싱글 몰트인 곳, 칵테일인 곳 등 가지가지다. 업계에 따르면 바에 ‘어린애들’은 안 온다. 손님의 대부분은 깔끔하고 세련된, 멋을 아는 사람들이다.
바는 또 ‘어둠의 자식’이다. 문이야 오후 6시쯤 열지만 손님이 많이 드는 건 9시가 넘어서다. 타운 바들의 영업시간은 보통 새벽 2시 안팎까지. 전문 바일수록 음식도 디너는 없고, 안주 위주다.
바는 라운지나 홀에 비해 매상 면에서 효자는 아니다. 바와 라운지, 패티오를 고루 갖춘 ‘블링크’(blink)의 경우 손님이 많은 주말로 따져도 바는 전체 매상의 20∼25%선이다. 이 업소의 신봉관 매니저는 그 이유로 좌석수가 홀보다 적고, 손님들이 오래 앉아있어 로테이션이 덜 되며, 남은 양주를 보관해 놓으면 다음에 와서 공짜로 마시기 때문인 것을 꼽는다.
그러나 바는 다른 공간보다 특징적이라는 점에서 업소 이미지를 좌우한다.
’블링크’ 주인 박성주씨는 공사비를 가장 많이 들였다며 크게 만들려다 작게 한 건 ‘손님이 와서 앉고 싶어야한다’는 신비감 전략이라고 한다.
타운서 젊음의 거리로 불리는 6가에 위치한 이 업소는 1960년대 유러피안 스타일을 모던화한다는 컨셉으로, 드물게 바를 직선 처리했다. 전체적으로 간결하면서, 동양의 향취를 가미한 스타일. 취급 주종은 와인, 샴페인, 하드 리커, 맥주, 소주, 소주칵테일, 칵테일, 온 더 락스 등 방대하다. 특히 하드리커는 50달러 짜리 ‘크라운 로얄’부터 2,200달러 짜리 ‘루이13세’까지 35가지, 칵테일은 50가지나 된다.
이에 비해 웨스턴과 베벌리의 ‘바비 런던’(bobby London)은 전문 재즈바다. 일요일을 제외한 주 6일 내내 재즈 공연이 열린다. 흰 그랜드 피아노와 하이실링, 좌석이 30개나 되는 긴 곡선의 바가 인상적인 이 곳은 주로 30대 후반부터 중년의 손님들이 찾는다. 드레스코드도 있다. 슬리퍼와 배기 팬츠, 모자 등 소위 갱 스타일은 사양한다.
에릭 민 매니저는 1년 전 오픈 했을 땐 손님들이 생소해했지만 요즘은 재즈 애호가가 전체의 30∼40%에 이른다며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한인 10명 중 8명이 크라운 로얄 스페셜을 마셨는데, 이젠 싱글 몰트가 가장 잘 나간다고 전했다.
한편 올초 아로마 윌셔센터 5층에 문을 연 ‘반줄’(banzul)은 전문 양주바. 칵테일과 와인을 팔지 않고 매칼렌18, 글렌리벳18 등 싱글 몰트를 포함, 21가지 하드 리커와 맥주를 취급한다. 아담한 바와 야경이 좋은 라운지가 특징이며 45개의 개인 양주 보관함도 갖고 있다. 전문 양주바 컨셉이라 서브하는 음식도 안주 위주다.
김시현 부사장은 고층에서 내려다보는 전망과 격조가 차별화 전략이라며 손님 연령층은 30대 중반∼40대 중반이 많다고 전했다.
금요일 밤, 타운의 어느 바에서 만난 저스틴 김(33)씨는 딱 두 문장으로 바를 정의했다.
분위기와 대화가 중요하지, 뭘 마시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돈은 다른 데보다 더 들 수 있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
혹시 아는가? 이유 없이 울적한 날, 온 더 락스에 슬로우 템포로 취하다, ‘신발을 닦아 가지런히 놓아주고 싶은’ 묘령의 여인을 만날지? ‘중경삼림’에서처럼.
<김수현 기자>
<글 김수현 기자·사진 진천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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