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라 최(피아니스트)
무려 4년의 공백을 깨고 지난 학기에 복학을 해서 이번 학기엔 꼭 졸업을 해야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공부에 임하고 있다. 3시간 동안 보는 음악 역사에 관한 필기시험이 한 달도 안 남았기에 요즘 내가 받는 스트레스는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다. 잠도 잘 안 오고, 어쩌다 피곤해서 잠이 들더라도 4시간 이상을 내리 자본 적이 없다.
공부는 할 수록 많아진다고 하던가. 간단히 책 몇 권 읽고, 그동안 정리해둔 노트 몇 권 읽고, 다시 글로 정리하면서 준비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실제 상황은 계획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어서 나를 자꾸 좌절시킨다. 우습게 봤던 책 한 권 다 읽고 이해하는데 한 달이 더 걸렸는가 하면, 그 책을 읽고 이해하기 위한 보충 자료들을 수집하고 읽느라 읽을 거리만 매일 산더미처럼 늘어간다.
누가 그랬던가. 학사학위는 ‘나는 참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라고 생각했을 때 받는 학위이고, ‘이제 뭔가 좀 알 것 같다’라고 생각했을 때는 석사학위가 주어지며, ‘난 아무 것도 아는 게 없다’라는 걸 깨달았을 때 주어지는 학위가 박사학위라고. 전문학생(Professional Student)이라는 별로 명예스럽지 않은 별명이 주어지도록 오랜 기간 학교를 다녔건만, 도대체 뭘 배우고 뭘 익혔는지, 내가 제대로 알고 있는 건 하나도 없다는 걸 요즘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다.
그나마 마음의 위안을 얻고자 엄마와 친구들에게 전화를 해도, 한결같이 ‘너처럼 오랫동안 공부를 한 애가 뭘 더 공부할 게 있다고 그래. 그냥 아는 대로만 쓰고 나와도 될텐데 무슨 걱정이야’라며 속을 긁는 얘기만 할 뿐이다.
한국에서 고 3을 치러본 적이 없는 내가, 요즘 1분 1초를 아끼며 책을 읽고 공부를 하면서, 시간의 소중함을 새로이 깨닫고 있다. 씻고, 운동하고, 연습하고, 장보고, 밥해서 먹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쓰레기 버리고, 이메일 체크하고 답장 쓰고, 우편물 수거해서 청구서 챙기고… 아무도 안 만나고, TV도 안 보고 그러려고 해도, 기본생활을 영위하는데 들어가는 시간이 너무 많아서 나를 깜짝깜짝 놀라게 한다.
내 경우 혼자 살면서 장도 대강 보고, 음식도 최대한 조리시간이 짧게 피자를 시켜먹거나 라면, 3분카레 등으로 때우고, 설거지도 그때그때 해치우고, 청소도 대강 진공청소기나 한 번 돌리고, 빨래도 대강만 분류해서 한꺼번에 해 치우고, 다림질이 필요한 옷은 아예 요즘 입지도 않고 있건만 매일 이러한 일상적인 일에 소요되는 시간이 만만치 않다.
혼자 살면서도 그런데, 남편과 아이들 몫까지 챙기려면 하루 종일 장보고, 밥하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에만 매달려도 시간이 모자랄 것 같다. 풀타임으로 일을 하면서 식구들을 챙기는 사람은, 그래서, 인간미가 좀 모자라는 아주 지독한 사람들일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든다.
손목을 다쳐서 피아노를 쉴 때 잠시 직장생활을 한 적이 있다. 꽤 큰 규모의 회사에서 일을 했었는데, 직장을 다니면서 비로소 기혼남이 미혼남보다 훨씬 더 승진이 빠를 수 있겠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리 부지런하게 살아도, 부인이 밥 챙겨주고, 옷 세탁해서 곱게 다려주고, 그 밖의 모든 사소한 일들을 해결해 주니, 직장의 일에만 전념할 수 있는 기혼남에 비해 미혼남의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등학생 딸을 둘 둔 미국인 기혼여성이 내 책상 근처에 있었는데, 아이들 문제로 남편과 큰 소리로 실랑이를 하다가 전화를 끊고는 내가 지나가자 활짝 웃으며, 아, 나도 와이프가 필요해라고 큰 소리로 말해서 같이 웃은 적이 있다. 그 사람이 말한 ‘와이프’란 남녀가 결혼을 했을 때 부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한 사람이 사회적인 일을 해 나감에 있어서 전적으로 그를 돕고 희생하는 또 다른 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나마 미국은 남녀의 역할이 한국에서처럼 확실히 구분되어 있지 않고, 가정 일을 부부가 서로 도와서 하는 게 어느 정도 보편화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당하는 자의 이름이 ‘와이프’로 불려진다는 사실이 입맛을 쓰게 했다.
요즘 들어 갑자기 그녀가 그 때 했던 말이 생각난다. 아, 나도 ‘와이프’가 있었으면 좋겠다. 내 시험이 끝날 때까지만 누가 장도 봐주고, 밥도, 설거지도, 빨래도, 청소도 해주면 정말 좋겠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엄마가 해주는 밥 먹으면서, 엄마가 빨아서 서랍 속에 넣어둔 옷 꺼내 입으면서 공부했던 시절엔 왜 더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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