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을 맞아 한국에 전화를 했더니 집집마다 사람들 북적대는 소리로 명절 분위기가 완연했다. 아이들 뛰어 노는 소리, 어른들 웃음소리, 바톤을 이어가며 바뀌는 전화선 너머의 상기된 목소리들 … 긴 연휴 덕분에 1박2일은 기본이고 2박3일씩 여러 식구들이 같이 묵으며 설을 쇤다고 했다.
한국 TV뉴스를 보니 거기에도 어느 가족의 설날 아침이 소개되었다. 4대의 대가족이 한복을 차려 입고 차례를 지내고 세배를 하고 윷놀이를 하는 모습은 남이 보기에도 흐뭇했다. “명절에는 역시 북적북적해야…”하며 단출한 미국생활의 무미건조함을 아쉬워하려는데 문득 한 장면이 눈에 걸렸다.
부엌 장면이었다. 차례상 준비만도 여간 일이 아닌데, 스무 명 남짓한 대가족의 아침, 점심, 저녁, 간식, 야식, 게다가 술상까지 차려 내려면 명절에 부엌은 말 그대로 불이 난다.
연극으로 치면 ‘무대 뒤’가 될 부엌을 TV 카메라가 잠깐 비쳤다. 음식 만들고 담고 나르느라 엉덩이가 부딪힐 정도로 분주한 부엌은 역시 여성 일색이었다. ‘무대’전면, 안방이나 마루에서는 아버지와 아들들이 숙연한 자세로 지방을 쓰거나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이어 남성들은 화투판, 술판을 벌이며 꼼짝 않고 앉아 잔심부름이나 시키고, 여성들, 정확히 며느리들은 잠시 앉아볼 틈도 없이 종종 걸음 치며 뒤치다꺼리로 연휴를 다 보내는 것이 보통 한국 가정의 명절 풍경이다.
무대 전면에서 보면 밤낮으로 먹고 마시며 노는 축제, 무대 뒤에서 보면 중노동의 노력봉사가 명절이다. 가족들을 위한 일에 기쁨이 없을 수 없지만, 명절은 여성들에게 우선 육체적으로 고되다.
할머니 세대, 어머니 세대가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한 데 최근 한가지 변화가 생겼다. ‘무대 뒤’사람들이 겪는 심신의 스트레스에 이름이 붙여졌다. ‘명절 증후군’이다. 명절이 가까워오면 ‘고생하고 열 받을’ 생각에 지레 소화가 안되고 가슴이 답답하고 두통이 오는 증상이라고 한다.
얼마전부터 명절만 되면 한국 언론에 ‘명절 증후군’이 등장하는 데, 미디어의 호들갑인지 실제 현상인지를 한국에 사는 친구에게 불어보았다. 그는 사실이라고 했다.
“직장에서 보면 명절 연휴 다음날이면 여직원들은 모두 지쳐있어. 출근하면서 오히려 해방감을 느끼는 분위기야. 그런 현상을 한 신문이 ‘명절 증후군’이라며 진단하고 나자 그후 그게 이름으로 굳어졌어”
수백년 있어온 상태라도 무명(無名)이면 없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름은 이미 존재하는 것에 대해 마침내 그 존재성을 부여하는 힘이 있다.
미국 여성운동의 불을 붙인 베티 프리단의 공로는 가정주부들의 보편적 문제, 하지만 이름이 없던 문제를 짚어내 그 존재를 드러낸 것이다.
1950년대 후반 미국 교외지역의 고학력 주부들은 겉보기에 부족한 것이 없었다. 그림 같은 집에서 냉장고, 오븐, 세탁기 등 최신 전자제품들을 갖추고, 남편과 아이들 뒷바라지하는 삶은 대공황과 전쟁을 겪은 그 어머니 세대로서는 꿈도 못 꾸던 호강이었다.
그 주부들이 그런데 행복하지가 않았다. 괜히 화가 나고, 이유 없이 울고 싶고, 사는 게 허망하고 … 그러다 보니 여기 저기 몸이 아픈 현상들이 있었다. 원인은 알수 없지만 워낙 그런 주부들이 많다 보니 뭉뚱그려 ‘가정주부 증후군’이라고 부르는 의사도 생겼다.
프리단의 ‘여성의 신비’는 여성들이 저마다 ‘혼자만의 일’그래서 ‘내가 뭔가 잘못된 것’으로 알던 무기력증이 이유 있는 보편적 문제라는 사실을 지적해냈다. 대학의 고등교육과 하등 상관없는 단순 가사노동에 선택의 여지없이 갇히는데서 나타난 좌절이었다.
‘명절 증후군’의 원인은 고된 노동이라기 보다 성적 불공평이다. 남녀평등에 익숙한 요즘 여성들이 명절에 시가의 대가족 울타리로 들어가면, 그 순간 가부장적 질서에 갇히는 데 숨이 막히는 것이다. 으레 그런 것으로 여겨지던 불평등을 불평등으로 보는 눈이 열리면서 그 현상에 이름이 붙여졌다.
이름의 힘일까? 한국의 열린 우리당이 여성 유권자들에게 아부를 했다. 정동영 의장등 남성 지도부가 ‘주부 체험’을 한다며 설날 설거지를 했다. ‘명절 증후군’을 의식한 남녀평등 실천의 제스처였다. 모든 변화는‘이름’에서부터 시작된다.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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