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초 미국 최대 은행인 시티그룹이 독일 최대은행인 도이체방크 인수를 검토했다가 포기했다는 루머가 프랑크푸르트 증권시장에 돌았다.
증권투자자들은 독일 은행이 미국 은행에 먹힐 경우 독일 경제가 미국에 종속된다는 사실보다는 미국 돈이 유입되면 도이체방크의 재무구조가 좋아진다는 이해관계에 매달려 주식을 사들였다. 하루만에 도이체방크 주
가는 5%나 폭등했다.
이 루머를 보도한 미국의 경제전문 케이블 채널 CNBC 방송은 시티그룹이 도이체방크의 인수를 신중히 검토했지만,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포기했다고 해설했다. 두 은행이 통합후 경영권 배분에 대해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도이체방크측 행원들의 정리에 큰 어려움이 예상됐다는 것이다.
시티그룹이 독일에서 소매 금융과 투자은행 분야에 진출해 있기 때문에 인수시 3만명의 도이체방크 행원 가운데 절반을 정리해야 한다는 분석이다. 이 보도가 맞다면, 미국 은행들이 유럽의 굵직한 은행을 사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것이다.
루머를 더 감칠맛 나게 각색하면, 뉴욕 금융시장을 장악한 유대인들이 나치 정권때 동족을 대량학살당한 독일에 보복하기 위해 경제의 심장인 은행을 먹으려 한다는 음모론으로 전개된다.
이런 음모론은 오랫동안 독일 금융계에 돌았고, 시티그룹의 도이체방크 인수설도 이의 연장선에서 나온 한때의 해프닝이었다. 음모론은 믿어지지 않지만, 독일 경제가 10여년의 슬럼프를 거치는 동안에 은행들이 부실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미국 은행들은 건실하기 때문에 루머는 양국의 현실적 기초여건(펀더멘틀)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상업은행은 경제에 있어 국방이나 치안과 다름없다. 평화시에는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지만, 위기가 닥쳐올 때 은행은 경제 안정의 마지막 보루로서의 역할을 한다. 국가 경제가 파산할 때 제조업은 외국 자본을 유치, 팔아 넘겨도 시설과 인력은 그 땅에 남지만, 은행이 넘어가면 결제수단 자체가 정부의 컨트롤 영역에서 벗어나 거시경제 운용이 불가능하게 된다.
미국의 시티은행도 80년대에 어려웠을 때 사우디의 왈리드 왕자에게 일정 지분을 내주고 자금 수혈을 받으면서도, 경영에 간여하지 않는다는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했었다. 만일 시티그룹이 도이체방크를 인수키로 마음을 먹었다면 독일 정부가 가만있었을까. 공적자금을 투입하고서라도 은행 방어에 나섰을 것이다.
여기서 시티그룹이 한국 최대 상업은행인 우리은행을 인수할 경우의 시나리오를 써보자. 우리은행은 지분 87%가 국민의 세금(공적자금)으로 구성된 국영 은행이다. 정부는 공적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단계적 민영화 스케줄을 가지고 있는데, 한국 내에서는 우리은행을 인수할 자금주를 찾기 어려운 실정이다.
재벌 그룹의 은행 소유권이 제한돼 있고, 덩치 큰 우리은행을 인수할 만큼의 자금 여력이 있는 중견은행을 찾기 어렵다. 외국은행을 돌아보면, 일본 은행은 금융부실이 쌓여 있어 한국을 넘볼 겨를이 없고, 프랑스와 독일 은행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한꺼번에 수조원의 돈을 밀어넣을 여력은 미국 금융권이 가장 크다. 그렇다면 미국 최대은행이 아시아의 대형 소매금융시장을 진출하기 위해 우리은행 인수에 나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상당히 현실성이 있는 시나리오다.
한국에서는 우리은행을 우리 자본으로 인수하자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이른바 ‘이헌재 펀드’가 대표적 케이스다. 김대중 정부에서 금융 개혁을 주도한 이헌재씨가 제시한 아이디어로, 사모펀드를 구성, 국내 자산가들로부터 3조원의 자금을 조성해 우리은행의 경영권을 확보한다는 내용이다.
한국보다 2년 앞서 외환위기를 겪었던 멕시코 경우, 처음에 5위권 밖의 은행을 매각했다가 곧이어 4~5위 은행도 팔고, 마침내 3위권 이내도 해외에 매각해 대형 은행 가운데 멕시코인이 주인인 은행이 없다.
한국은 국가 재정이 건실하고, 외환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상업은행들의 수익이 크게 개선돼 멕시코와 비교할 수 없는 강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 은행의 경영권 방어는 경제 주권의 수호라는 관점에서 신중하게 논의하고 참여를 유도해야 할 이슈다.
김인영 <서울경제 뉴욕특파원>
inkim@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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