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상<수필가>
새벽 4시,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미안해, 서울에서 네 전화 번호를 알아내곤 거기 아침을 기다리다 못해 걸었어. 나야 영일이 말레이시아에서 30년만의 친구 목소리가 파도 되어 가슴으로 달려 왔다. 아 영일이... 우리들은 목이 메어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영일이는 고등학교 때 우리집으로 자기 멋대로 짐을 옮겨와 같이 지낸, 마구잡이 독서열, 시대를 함께 고뇌하던 나와는 죽이 맞는 젊은 날의 공범자였다.
그는 건축학과 재학 중에 공군을 지원했다. 복학했을 때는 내가 육군에, 내가 취직하여 정신 없을 때 그는 중동지역 공사 책임자로 나갔다. 서로 엇갈려 제대로 대면한 기억은 희미해도 이 친구가 보낸 편지는 기억한다. 우리가 빽이 있냐 그렇다고 실력이 두드러지냐 아까운 시간 술 만 먹지말고 영어 하나는 군대 있는 동안 끝내버려라.
내가 미국으로 건너온 후 그는 말레이시아에 정착했는데, 모 일간지 새해 표지에는 한국을 빛낸 사람으로 뿔테 안경 낀 이 친구 얼굴이 전면을 장식한 적도 있었다. 문득 선이 굵은 수채화를 볼 때나 손바닥이 엄청 큰사람과 악수를 할 때면, 그림 잘 그리고 축구 골 키퍼였던 그가 생각나곤 했다.
10년 전, 나는 베이브릿지를 지나는데 차안의 라디오에서 말레이시아 한 아파트가 무너져 영일이라는 사람이 죽었다지 않는가. 별안간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싶었다. 다리를 건너 길옆에 차를 세우고 한참은 정신나간 사람처럼 그러고 있었다.
후에 알아보니 사고 당일 친구와 아들은 출타 중이었고 참변을 당한 건, 아내와 딸이었다.
영일이는 새벽 통화에서 중학친구들 가을여행에서 만나 자더니 공사의 차질이 생겨 못 왔다. 여행 중에 그는 무조건 자기한테 오라고 전화했다. 만나보고도 싶고 도대체 그가 쿠알라룸플을 왜 떠나지 못하는지 이유를 알고 싶었다. 말레이시아행 비행기는 7시간인가를 적도의 기류에 흔들려 혼났다. 자정이 지나서야 출구를 나서니 영일이가 달려 왔다.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친구는 나이를 먹지 않았다. 둥글고 큰 코, 무언가를 열심히 찾는 눈,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몸짓, 생각과 행동이 멈추지 않는 사람은 세월도 비켜 가는가보다.
피아니스트인 그의 새 아내가 나를 먼저 발견했단다. 처음 뵙지만 하도 이야기를 들어서요. 소리 없이 웃는 무공해 풀잎 같은 여자였다.
멀리, 쿠아라룸풀 중심가에는 영일이가 설계하고 건축한 75층 빌딩이 깨어 있어 나를 반긴다. 도시 안에는 그가 관여한 건물이 많았으며 그는 몇 안 되는 영주권자 외국인이었다.
다음날 새벽, 그 나라 고유 음식점으로 안내하더니 죽은 아내의 사진첩을 꺼내 보였다. 밝고 건강한 미인이었다. 부부 싸움한 다음날도 출근하는 남편에게 포옹을 거르지 않은,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예측했던 사람처럼 보였다고 했다.
딸 희원이는 그 당시 하바드 대학에서 합격통지도 받아 놓은 상태였다. 다니던 학교에서는 희원가든을 만들고 희원장학재단도 만들어, 영일이도 많은 돈을 희사했다.
세계에서 몇 번째로 높다는 타워에 올라가 시내를 내려다보는데 처녀로 시집온 영일이 새 아내는 멀리 산자락을 가리키며 아파트가 무너진 자리래요. 고급 아파트였는데도 산언덕 공사장에서 물 흐름을 바꾸어 놓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건물이 뒤로 넘어진 참사였단다. 아직도 옛사랑의 기억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남편을 보듬어 주는 새 아내가 고마웠다.
그곳 주민들은 6,70년대 우리네처럼 순박했다. 영일이는 말레이시아 아이들이 스치면 공연히 툭툭 장난을 친다. 그런 행동에서도 어떤 외로움이 묻어난다. 하기야 그는 학생 때도 장난이 심했다. 밤에 책을 읽다가도 모찌를 받아 친구들에게 팔고 친구들이 산 떡의 반은 먹어치우기도 하고, 오는 길에는 여학교 교문 간판과 건너편 사범대학 간판을 바꾸어 걸어 놓았다. 주먹친구들도 많았는데 그들은 농업학교에서 닭서리 고구마 서리해서 삶아들고 도서실로 찾아와 나까지 몸보신 시켜주곤 했다.
영일이는 어머니 비지찌개는 참 맛있었는데 중얼거리더니 큰 금액의 수표 한 장을 우리 어머니 드리라고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우리들이 자기 어머니를 우리어머니로 호칭하는지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는 재산을 사회에 환원시켜가고 열심히 기도하는 그곳 한인개척교회 장로가 되어 있었다. 혹이나 내가 물질의 권위에 눌려 글쓰기를 게을리 한 건 아닌지 서울까지 따라와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그래 알아 친구야, 세상엔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독일 속담처럼, <금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되면, 별이 아름답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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