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범<문학박사>
새해 아침이다. 새벽 예불을 위해 일어나 현관문을 열어 젖히니, 차가운 공기가 온몸으로 전해져 온다. 오싹한 한기를 느끼면서도 싱그러운 기운에 기분은 한결 상쾌하고, 머리는 맑아진다. 겨울철 우기를 맞아 내린 비로 계곡 가득 불어난 물 때문이겠지만, 신새벽 여명을 뚫고 들려오는 절 앞 계곡의 물소리는 오늘따라 더욱 우렁차다.
새해라는 생각 때문인가, 모든 것이 새롭고 밝게 느껴진다. 어찌 보면 새해라고 하는 것은 해와 달이 바뀌고, 날자가 바뀌는 것에 우리 인간들이 인위적으로 숫자를 매겨 놓은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새로 해가 바뀐다는 것은 단순히 인위적인 숫자놀음만은 아닌 것 같다.
달력은 나름대로 자연의 변화와 흐름을 관찰하여 그 법칙에 따라 만든 것이다. 해가 뜨고 달이 뜨는데 따라서 우리 생활과 기분도 달라지고 동·식물의 성장발육도 영향을 받는다. 해와 달의 주기를 관찰하여 나온 양력과 음력의 숫자는 그만큼 우리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새해를 맞이하여 새로운 기운을 느끼고 새로운 기분으로 일을 도모하는 것은 변화하는 자연의 기운과 우리들이 숫자를 통해 의미부여한 인간들의 인위적인 생각이 결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기운과 생각에 영향을 받은 탓일까, 어쨋거나 사람들은 으레 새해가 되면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새해 소망을 말하고 계획을 세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세상 돌아가는 꼴이 새해라고 뭐 뾰족한 수가 없을 거라고 한다. 또 어떤 이들은 해마다 작심삼일(作心三日)이 되기 뻔한 계획을 세우는 데는 이골이 났다고 한다. 간혹 제법 인생에 달관이라도 한 듯, 뜬 구름과 같고 나그네 길과 같은 인생에 세월의 오고감이 무슨 실체와 의미가 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본래 완전하여 진리 그 자체인 부처님의 나라나 하느님의 나라는 절대의 세계이니 상대적인 오고감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선악과 시비, 선후와 좌우의 분별과 대립으로 얽혀 돌아가는 상대적 세계인 사바세계의 중생들인 우리 인간들에게는 오고감이 없을 수 없다. 그래서 절망과 한탄 속에서도 해가 바뀌면 늘 되풀이되는 줄 알면서도 매번 새로운 희망을 말하고, 발원을 하는 것이다. 그마저 하지 않으면 정말 희망은 없다. 그렇게 라도 매년 작심삼일을 되풀이하는 가운데 사실은 우리의 희망의 싹은 완전히 죽지 않고 되살아 날 수도 있다.
그러면, 정말 희망은 있는가? 아니다. 소망을 말하고, 계획을 세우는 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작심하여 뿌린 씨에 삼일만에 물주기를 끝내서는 평생 한번도 제대로 싹을 틔우고 꽃 피워 열매 맺을 수 없다. 처음 마음을 끝까지 잃지 말아야 한다.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 ‘처음 마음을 낼 때 곧 바른 깨달음을 이룬다’는 것은 매순간 처음 마음을 내는 그 초발심을 잃지 않을 때 궁극의 목표인 바른 깨달음을 이룬다는 뜻이다. 매순간 초발심을 잃지 않을 때 그 초발심(初發心)은 항상심(恒常心)이 되며, 늘 그러한 평상심(平常心)이 된다. 그러므로 ‘평상심이 도(平常心是道)’라는 말은 그렇게 늘 초발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말이 아니라 ‘오직 할 뿐’인 실천행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자기완성을 위해 스스로 노력하는 곳, 희망은 바로 거기에 있다.
기독교 성경에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 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 복음 7:21)라고 한다. 『육조단경(六祖壇經)』에는 선지식들이여, 자기 성품이 스스로 청정함을 볼지니, 스스로 닦아 스스로 이룸이 자기 성품인 법신(法身: 진리의 본체)이며, 법신 그대로 행함이 부처님의 행위이며, 스스로 짓고 스스로 이룸이 부처님의 도(善知識 見自性自淨 自修自作 自性法身 自行佛行 自作自成 佛道)라고 한다.
물기를 흠뻑 머금은 언덕과 산등성이의 빛은 날마다 푸르름을 더해간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이제 길을 가야 한다.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막다른 절벽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듯이 길을 가야 한다. 그렇게 행하는 곳에 뜻이 펼쳐지리라. 희망은 오직 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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