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피 하루 1인당 단돈 5달러 ‘건강투자’
새해 아침, ‘첫 마음’에 설렌다면 아직 삶에 대해 뜨거운 것이다.
LA 동부에 사는 한인 부부 70여명은 매일을 새해처럼, 첫 마음으로 시작한다. 찬이슬에 발목 적시며 폐부 깊숙이 청량감을 호흡하고, 해뜨기를 기다린다. 월넛 ‘로스앤젤레스 로얄 비스타’ 골프장을 주 7일 찾는 부부들이 그 주인공. 이쯤 되면 골프는 취미가 아니라 생활이다. 차돌처럼 단단한 골프공이 ‘따악’ 소리를 내며 새벽 공기를 가르는 맛도 맛이지만, ‘말똥만 굴러가도 웃음보가 터지던’ 10대 시절처럼 수다 떨고 웃으며 스트레스를 풀어내는 게 그렇게 재미난다고 한다. 놀고 먹는 자들의 한가한 취미가 아니라, 건실하고 부지런한 중년들의 살맛 나는 모임이라고 입을 모으는 사람들, 잠 몇 시간 덜 자고 10년을 더 산다는 그들을 어느 월요일 아침, 그린 필드에서 만나봤다.
월넛에 있는 ‘로스앤젤레스 로얄 비스타’ 골프장. 주 7일, 1년 365일 이 곳을 찾는 한인들은 줄잡아 70여명이다. 여자 20여명, 남자 50여명인데 이중 99%는 부부동반. 어림해 30여 쌍은 된다.
연중 무휴는 아니지만 ‘천재지변’급 일이 아니면 아침 세수하듯 필드를 찾는다는 이들은 여름엔 오전 5시, 해 짧은 겨울에도 6시면 어김없이 티샷을 날린다. 처음엔 ‘골프에 미쳐서’ 시작했지만, 매일 만나다보니 자연스레 친해져 이젠 ‘이름은 없어도 유대감 끈끈한’ 모임을 이뤘다.
회원들은 주로 다이아몬드바, 하시엔다, 롤랜하이츠 등 이 지역에 사는 30대∼85세 한인들. 비즈니스도 20분 이내 거리라 생활권이 이 지역에 집중된 로컬 사람들이다. 75세인 양재성씨를 포함, 최고참은 85세, 84세인 노인 부부다. 주류는 50∼60대 부부인데 날마다 오는 순서대로 조를 짜 남녀가 같이, 또는 나눠서 나인홀 라운딩에 나선다.
골프 경력은 보통 10년 이상, 5년부터 최고 30년까지 있다. 올드 멤버와 최근 1년 새 가입한 신규 회원 10여명까지 다양하지만 골프 광들이라 못 쳐도 싱글, 보기 게임이라는 설명. 이들의 골프 예찬, 모임 예찬은 36홀, 45홀보다 길어 귀가 따가울 정도다.
10여 년 하다보니 부지런해질 수밖에 없죠. 골프장 밖에선 살림도, 사업도 얼마나 잘 하는데요 이 모임 중 여성 회원들의 모임, ‘우먼스 클럽’을 이끄는 그레이스 최(54)씨의 너스레다.
골프와 건강과의 상관관계에 대한 회원들의 설명을 듣다보면 ‘골프가 만병 해결책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장 협착증으로 고생했던 노소희(60)씨는 80년 대 중반부터 골프를 시작, 말끔히 나았다고 한다. 디스크를 앓았던 신영자(60)씨도 필드를 걸으면서 통증에 무감해졌고, 햇빛에만 나오면 가려웠던 햇빛 앨러지도 사라졌다.
87년 심장을 수술한 은인숙씨. 골프를 시작한 89년 당시엔 나인 홀도 걷지 못해 카트를 타고 돌았는데, 이제는 하루 45홀도 거뜬할 만큼 건강해졌다. 휴일이나 주말엔 필이 꽂히면 45홀을 도는데, 시간을 재보니 아침 6시에 티샷하면 밤 8시에 끝나더라고 한다.
이밖에도 비만이었는데 골프 치면서 허리 살이 쪽 빠져 트리플 엑스트라 라지 옷을 남들에게 나눠준 회원 얘기, 얼굴 작아진 회원 얘기 등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환갑인 노소희씨는 어쩔 수 없이 못 나온 날은 종일 몸이 찌뿌드드하고, 더 힘들더라고 한다.
검소해지고, 회원들 간 친목을 키울 수 있다는 것도 예찬론의 한 이유다. ‘골프’ 하면 유한 마담으로 치부하는 건 이들에게 예외라는 설명이다. 이 골프장의 패밀리 멤버십에 가입하면 부부가 내는 한달 회비는 310달러. 하루 1인당 5달러 꼴이다. 커피 한 잔 값으로 건강을 산다는 말이 나올 만도 하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니 음주가무를 멀리 하게 되고, 몸 뿐 아니라 정신 건강이 수양되니 도박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흔히들 하는 내기 골프도 이들에겐 맥도널드 햄버거가 전부다. 진 사람들이 1∼2달러씩 내 라운딩이 끝나면 골프장 앞 맥도널드에서 커피와 브런치를 사는 정도.
진짜배기 실속은 따로 있다. 바로 부부 금실이 좋아진다는 것. 부부가 공동 취미를 키우면서 화제가 통하고, 필드를 걸으면서 자연스레 얘기를 많이 나누게 되며, 늙어서도 같이 할 수 있는 운동이라고 회원들은 입을 모은다.
싸웠어도 다음날이면 화해할 수밖에 없어요. 사람들이 다 아는데 표정 관리가 돼야 말이죠
그러나 무엇보다 회원들을 사로잡는 매력은 ‘건강함’이다. 새벽에 일어나 운동으로 하루를 열고, 몸과 마음이 유쾌해져 일터로 향하는 맛이 ‘죽인다’는 설명이다. 동이 채 트기도 전 새벽 이슬에 젖은 잔디밭에 발목을 적시고, 남이 밟지 않은 길을 걸으면서 해뜨기를 기다리는 낭만이 이들에겐 혀끝에 착 붙는 술 보다 좋다고 한다.
은인숙씨는 잠 아껴가며 하는 거지, 남는 시간에 하는 게 아니다라며 2∼3시간 일찍 일어나 10년 더 사는 기분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수다를 떨어도 날마다 화제가 달라요. 상쾌해서 그런지, 별 것 아닌 것에서 깔깔대게 되고, 참 재미나요. 스트레스 확 풀고 일터로 가니 인생이 즐겁지요 그레이스 최씨의 말이다.
매일 만나다보니, 누가 안 나오면 ‘왜 안나오나’ 궁금할 정도다. 서로 집안 일 훤하고, 별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아니 경조사 챙겨주는 건 자연 수순. 은석찬씨는 사실, 바쁜 이민 생활에서 눈만 뜨면 얼굴을 보니 가족보다 더 친한 느낌이라고 한다.
그렇게 라운딩을 하고 나면 회원들은 골프장 앞 맥도널드로 모인다. 가게 문 열러 떠나야 할 때까지, 20∼30분간 브런치를 먹으며 2차 수다가 시작된다. 화제의 주제는 인생살이, 세상 돌아가는 얘기, 장사 얘기 등 다양해 동네 사랑방, 반상회가 따로 없다고 한다.
모임 규모가 커지면서 ‘좋은 일도 좀 하자’는 취지로 매월 5달러씩 걷어 연말이면 자선단체에 기부도 한다. 지난 연말엔 이스턴 골프 클럽 주최로 클럽하우스에서 120명이 모여 송년회를 열었고, 내년엔 유럽 가려고 1년 간 6,000달러를 목표로 매달 500달러씩 ‘여행 계’를 들고 있다.
신기한 건 회원들 모두 자녀들이 다 잘 됐다는 거예요. 누구 하나 자녀 문제로 속 썩이는 사람 없어요. 부지런하고, 성격 모나지 않고, 건전한 승부욕이 있기 때문 아닐까요
회원들은 지난해 불경기로 마음 고생했던 한인들, 새해엔 새벽을 가르는 골프 공처럼 시원한 일들만 생기길 기원했다.
<글 김수현 기자·사진 김영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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