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동 휘 (소설가)
또, 소나타 타고 있네.
그것이 무슨 얘기니?
쟤 말야.
인숙의 시선은 구석 테이블에서 손짓하며 수다가 한참 늘어진 긴 머리의 뒤통수에 가서 머문다.
귀옥이 말이니?
줄로 줄로 엉켜 겨우 등단한 후 등단 작품만 여기저기 발표하고 있는 주제에 작가라고 하니......
등단했으면 작가가 아니니?
난 그래도 쟬 괜찮게 생각했어. 여기와 있는 동창들 중에 글 쓴다고 하면서 제일 먼저 등단했잖아. 그래서 가끔 전화도 해보고 만나 이야기도 해봤는데 그것이 아니었어.
오늘 선희가 볼 때 인숙이는 평소의 인숙이 답지 않은 어휘와 표정을 짓고 있다. 소문이 헛소리가 아니 것 같았다. 인숙의 음성이 떨리고 있다. 인숙이 속이 타는지 얼음이 둥둥 떠 있는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킨다. 인숙은 이마와 콧등과 눈 꼬리를 한꺼번에 찡그리며 한 손으로 가슴을 누른다. 이마에 그어대는 잔주름들이 인숙의 삶의 한을 드러내고 있다.
인숙은 한국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일찌감치 등단했다. 그 후 꾸준히 작품을 발표해 비중 있는 문학상을 타기도 한 중견 시인이다. 격정적인 열애 끝에 결혼을 했다. 남자는 즉시 다른 의자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인숙은 아들을 끌어안고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서 왔다. 그 사랑마저 고무 풍선처럼 터지고 말았다. 설상가상이란 말이 인숙의 삶을 위해 만들어져 있는 단어 같았다. 산고 끝에 낳은 자식을 어미 눈앞에 먼저 저승으로 보냈다. 그런 일을 당해봐야 생살 찢는 고통과 아픔이 어떤 것인지 알게된다. 그런 모든 한恨이 여물어 토해내는 인숙의 시어詩語들.
선희가 원광 선생 일곱 번째 시집 ‘밤이슬 속에서’ 출판 기념회 장소에 들어서자 인숙이가 달려와 반갑게 맞아 주었다. 결혼하기 전에는 아주 가깝게 지냈지만 결혼하면서 멀어졌다. 그러다 다시 이곳에서 만났지만 서로의 생활환경이 다르다보니 자주 만나지 못하고 있다. 인숙이 무척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은 알고 있다. 그러다 다시 옛날의 열정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그래서 선희가 이곳으로 왔는지 모른다.
시 마당이라고 시 쓰는 사람들의 모임이 있어. 나도 너무 오랫동안 펜을 놓고 있다보니 머리가 굳어져 그 모임에 나가잖아.
그래, 이야기 들었다. 아직도 그 모임에 나가고 있니?
나가지 않은지 오래 되었어. 저 계집애 때문에 안 나가.
옛날엔 안 그랬는데 왜 그래.
아, 글쎄. 서로 작품을 논하는 자리에서 어떤 형태의 삶이라도 함부로 말 할 수 없는 절절함과 의미가 있는 법인데.
귀옥이가 뭐라고 했는데?
순탄한 가정 생활에서 순수한 문학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요? 하는데 사람의 오장육부를 왈칵 뒤집어 놓지를 않나. 하여튼 저 계집애 사사건건 말꼬리를 잡고 물귀신처럼 늘어지는데 난 학을 뗀다니까.
서로 연락이 없겠구나?
저런 계집애 꿈에 나타 날까봐 겁난다.
저 애, 좀 그렇잖아. 네가 이해하고 참아.
저 계집애 보기 싫어 이런 모임에 잘 안나오는데 오늘은 어쩔 수 없었어. 이곳엔 문단 선배 한 분밖에 더 있어?
그래, 난 본래 이런 곳에 취미가 없잖아. 한 교회에 나오시는 분이고 또 너를 한번 만나보고 싶어서 왔어.
너도 신문을 보고 있지만 이 지역에 여간 웃기지 않는 인간들이 많다.
요즘 정치고, 예술이고 다 코미디들 아니니?
아, 글쎄. 칼럼 한번 쓰고 나면 작가 누구예요. 라고 소개를 한다.
작가와 칼럼리스트는 다른 것 아니야?
그래서 내가 어디로 등단했죠? 하고 물으면, 꼭 문예지로 등단해야만 작가예요? 한다.
인숙은 열이 나는지 냉수 컵을 들어 마신다. 인숙은 잘못되어 가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 못하는 성격이다. 냉수를 마신 인숙은 한숨을 길게 내쉰다.
요즘 글 쓴다는 것이 부끄럽고 창피스러워. 사람들이 미국에 와 살면서 좀 이상해 지는 것 같아. 넌 그렇게 생각 안 해?
환경이 바뀌니까 그런 것이 아닐까? 그리고 너무 조급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더 그런 것 아닐까 생각해.
아무리 환경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다들 너무 하는 것 같아.
내가 보기엔 글을 쓰고, 책을 출판하는 것이 자아도취 속에 있는 것 같아. 나는 이런 액세서리를 걸치고 있다고 자랑하는 것 같이 말이야.
그때 원광선생이 단상 위 마이크 앞에 섰다. 원광선생이 젊었을 때 대강당에서 강의하시던 그 칼칼한 음성으로 장내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운동선수는 게임에서 승리를 했을 때 금메달이 돌아가고, 화가는 그림을 그릴 때, 시인은 시를 발표해야 시인이고 작가라는 호칭을 듣고 대접을 받는 것입니다. 문인이란 호칭을 가진 분들 좋은 작품을 많이 발표하도록 하세요. 어디 한 두 편 발표하고 작가라고 하지 말고요.
권광 선생은 시의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끝으로 출판 기념회는 끝이 났다.
인숙아, 오늘 너 이야기 들으니 이해가 간다. 귀옥이 미워하지 말아. 그리고 넌 너의 작품세계 속으로 들어가. 예술가는 작품으로 논하는 것이 아니니?
인숙이와 선희가 차 있는 쪽으로 걸어가는데 누가 뒤에서 인숙을 부른다. 돌아보니 귀옥이 숨을 헐떡거리면서 빠른 걸음으로 온다.
얘, 인숙아, 아니 선배님!
인숙이와 선희는 갑작스런 선배란 말에 눈이 둥그래져 서로 쳐다본다.
선배님, 그동안 제가 선배님한테 무례한 행동을 한 것 용서해 줘요. 정말 미안했습니다.
인숙은 귀옥의 손을 잡는다.
이런 게 사람이 살아가는 질서가 아니겠니, 그래 네가 이렇게 이야기해주니 고맙다.
선배님, 고맙습니다.
옆에서 이런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선희가 끼어 들었다.
예술의 세계가 그렇게 선후배의 서열이 강한 줄 몰랐다. 문단에서나 그런 것 찾고 이제 친구로서 서로 화해하자.
세 사람은 서로 손을 잡고 포옹을 한다.
선희야, 인숙아, 내 다음주 근사한데서 점심 초대할게. 그때 다시 만나자.
그렇게 인숙이와 귀옥의 앙숙이던 감정이 높은 산 속의 눈이 녹듯이 깊은 계곡으로 흘러내린다. 세 여자는 다시 한번 더 손을 굳게 잡고는 제각기 차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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