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범<문학박사>
연말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송년모임과 크리마스, 년말년시의 휴가를 앞두고 조금씩은 들떠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올해의 분위기는 그렇지가 않은 것 같다. 들뜬다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춥고 배고픔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한국의 교수신문에서 주요 일간지 칼럼니스트와 교수 76명을 상대로 올해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를 정리할 수 있는 사자성어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들의 16%가 ‘우왕좌왕(右往左往)’을 꼽아 1위를 차지했고, 그 다음이 ‘점입가경(漸入佳境)’, ‘이전투구(泥田鬪狗)’, ‘지리멸렬(支離滅裂)’, ‘아수라장(阿修羅場)’이 2-5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참으로 한국 상황을 잘 나타낸 사자성어들이라는 생각이 들어 쓴웃음이 나온다.
사람들은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할 때면, 지난해의 여러 가지 어려움과 어두웠던 기억을 다 떨쳐버리고, 새해와 함께 새로운 희망과 밝은 빛을 기대한다. 지금 비록 어렵고 어두워도 희망을 가지고 밝아오는 새벽을 맞이할 수 있다면, 그 어렵고 어두운 기억은 송년회의 술잔에 담아 마셔버리고 다가올 희망에 취해 기분을 내며 들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주변에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은 아니라고 한다. 해가 바뀐들 뭐 뾰족한 수가 있겠냐는 것이다. 한국의 정치판은 더 기대할 것도 없고, 경기도 나아질 것 같지 않으니, 먹고사는데 한국 경기에 많은 영향을 받은 한인들의 형편이 좋아질 것이 없다는 것이다. 미국 경기도 말만 그렇지 정치인들이 하는 것을 보면 소수민족과 저소득층이 살기는 더 힘들어지리라는 것이다.
환절기가 원래 을씨스럽고 감기도 잘 든다. 한겨울 혹한 보다 초겨울 환절기나 꽂샘추위가 수치상으로는 춥지 않은데도 더 춥게 느껴지는 법이다. 어제 12월 22일은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긴 동지(冬至)였다. 일년 중 빛이 가장 작고 어두움이 가장 많은 날이기도 하다. 그런데, 『주역(周易)』의 괘상으로 동지를 나타내면 지뢰(地雷) 복(復)괘이다. 여섯 개의 효(爻; 막대)로 이루어진 괘의 모양은 위에 다섯 개의 음효가 있고 맨 아래에 양효가 있는 것이다. 즉 하나의 양(陽)이 다섯 개의 음(陰)아래에서 자라나 올라오기 시작하는 모양이다. 가장 밤이 긴 날, 가장 어두운 날인데, 사실 이날을 기점으로 다시 밤은 짧아지기 시작하고 낮이 길어지기 시작한다. 동지는 새롭게 양기가 싹트는 날인 것이다. 그래서 옛날부터 동양에서는 동지를 일년의 시작으로 보았다. 우리 풍습에도 동지를 아세(亞歲), 작은 설날이라 하였다. 한국의 상황이 정말 더 이상 갈 데가 없이 ‘우와좌왕’하고, ‘점입가경’이며, ‘이전투구’라면, 동지(冬至)가 되어 하나의 양기가 밑에서부터 되살아나듯이, 이제 정말 새 희망과 빛을 내려고 하는 몸부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년의 절기의 변화처럼 우리 삶의 점화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기득권에 연연해하고, 미래에 대한 헛된 공상만으로는 희망의 불꽃에 점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남의 집 목장의 소를 세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동양에서 신년운세와 토정비결, 점치는 일의 사상적 바탕으로 삼는 『주역(周易)』의 가르침의 핵심은 점괘를 뽑아 길흉화복을 맞추는 데에 있지 않다. 주역에서는 항상 자기가 처한 時(때)·所(장소)·位(자리)를 잘 살피고 그 때와 장소, 자리에 맞게 지혜롭게 행동하라는 것을 강조할 뿐이다. 때와 장소, 자리를 잘 살피고 거기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길(吉)이고 그렇지 못한 것이 흉(凶)일 따름이다. 그것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항상 ‘지금 여기’를 살피고 살아가는 것일 뿐이다. ‘지금 여기’서 스스로 희망의 불꽂을 점화하려 노력하는 이에게 내일과 새해는 희망으로 오는 것이다.
희망과 꿈은 그 무엇이, 다른 어떤 사람이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다. 미래를 마냥 꿈꾼다고 희망이 있는 것이 아니다. 과거에 얽매여 현실을 푸념하는 것으로도 희망은 찾아지지 않는다. 영어 속담에도 이런 말이 있지 않는가: 어제(과거)는 역사, 내일(미래)는 미스테리, 오늘(현재)는 선물이다. 그래서 현재(present)를 선물(present)이라고 한다. 내일이 미스테리가 아닌 희망으로 만들기 위해서 ‘지금 여기’라는 선물을 축복으로 향유하지 않으면 안된다. 매 순간의 ‘지금 여기’를 그렇게 살아 갈 때 우리의 삶 전체가 선물이요, 축복이 되는 것이다. 지금 여기 현실에 충실하라는 것, 동서양의 모든 성인들의 가르침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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