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자든 아니든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성탄캐럴처럼 아스라한 추억들이 겨울나무 눈꽃처럼 가슴에 피어나기 마련이다. 지난날 유행하던 팝뮤직을 듣게 되면 오히려 고국하늘이 그리워지는 것처럼, 서구가 원산지인 성탄이 되면 한해의 마무리와 맞물려 마음들이 들뜨게되고 일상사에도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진다.
나의 크리스마스 기억은 피난 내려가 자란 공주(公州)에서의 어린 시절, 산타할아버지로부터 시작된다. 큰길가 라디오 방 확성기에서 기쁘다 구주 오셨네-가 펴져 나오기 시작하면, 나는 집안 청소며 군소리 없이, 다급해지면 심부름을 자청해서 어머니로부터 착한 어린이로 눈 도장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성탄 아침 머리맡에 성에 차지는 않아도 선물 하나가 놓여있게 된다. 그러나 조숙한 친구들이 산타할아버지가 굴뚝으로 선물을 공수해 오는 것은 거짓임을 알려주었을 때, 남자들의 목젖은 이브가 준 사과가 죄스러워 목에 걸린 거라고 알고 있다가 그게 아님을 안 뒤의 실망처럼 그지없이 허무한 것이었다. 아무튼 산타할아버지가 가짜라는 것을 어머니께 말씀드리자 야속하게도 그 해부터는 선물이 놓여있지 않았다. 미국에서는 더 많은 어린이들이 속고 있었다. 산타클로스에게 요구사항을 적어 보내는 편지가 우체국에 쌓여 골머리가 아프다는 것이다.
산타 선물의 실망을 털고 내게 재기(?)할 기회를 준 것은 성탄 카드였다. 초등학교 성적표 비고란에는 선생님이 너무 그림을 그린다. 라고 적어 보냈다. 정말 그 때는 산수시간은 물론 시도 때도 없이 그림을 그렸다. 성탄시기가 되면 밤이 깊도록 카드를, 주로 흑백으로 눈 덮인 숲 속의 서구식 헛간(barn)을 그렸다. 인적 없음이 좋다며 사범학교에 다니던 이모, 이종사촌 누나, 사범대학생 외삼촌, 외갓집에 하숙하는 학생들까지 그 카드를 헐값에 사갔다. 결국 두 번째 성탄 추억은 경제적 소득과 따뜻한 방에서 미지의 세계를 그린 기쁨이었다.
고등학생 때는 성탄 전날 초저녁부터 손님 없는 대중탕에 찾아가 뜨거운 물 위로 목만 내놓고 있었다. 자정 미사시간까지 몸의 때뿐만 아닌 마음의 것까지 씻어내는 청결 의례다. 무엇보다도 싱숭생숭해지는 마음의 동요를 자제하는 방법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그 때는 거리에서 여학생과 얘기만 나누어도 정학처분, 성당에서도 불란서 신부님은 여학생들을 오래 쳐다만 보아도 혼을 내셨다. 그럴수록 이성은 다가갈 수 없는 신비한 존재였다. 똑바로 바라볼 수는 없어도 그들과 공기를 같이 호흡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시절이었다.
그 와중에도 몇몇 친구들과 비밀 결사대처럼 사범학교 여학생들과 독서회를 만들었다. 일주일마다 약속된 장소에 읽은 책을 가져다주고 다음 책을 가져왔다. 방학시기 그러니까 크리스마스 때가 되서야 같이 모여 독후감을 나누었는데, 그녀들은 교육대학이 생기기 전 마지막 사범학생들, 그녀들은 어찌나 똑똑한지 이성에 대한 동요보다는 긴장감이 앞서는 모임이었다. 그때수확은 독서의 편식에서 벗어남과 정신세계와의 어렴풋한 만남이었다.
대학시절 명동성당 합창단에 들어간 이유 중 하나가 여학생들과 만나고 싶어서였다. 길에서는 말도 걸지 못하게 쌀쌀맞던 그녀들이 친절하고 다감하게 대해 주었다. 그들이 만들어 내는 화음은 지금도 꿈속에서처럼 기억된다. 성탄절이 임박하면 성가연습 이외에 포크댄스도 배웠다. 한차례 율동이 끝나자 숨을 몰아쉬며 강사의 설명을 듣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슬며시 나의 팔을 잡고 있었다. 돌아보니 복스럽게 생긴, 나와는 눈인사나 하던 K대학 여학생이었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장난스레 웃으면서도 오히려 팔짱을 낀 체 다시 앞을 보고 있었다. 그녀도 성탄의 설레 임으로 인한 행동이었겠지만 가끔 그 일이 생각나면 혼자 웃는다.
군복무시절 이맘때면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는 총각소위들, 스케이트 행렬이 홍천강 얼음 위를 질주했었다. 깊은 밤, 찬바람을 타고 강이 우는소리, 소복한 여인처럼 푸른 달빛이 내려앉는 소리, 그러나 그 시절에는 젊음과 외로움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몰랐었다.
끝없이 잔잔한 성탄 추억들은 삶의 흔적이다. 그 흔적들과의 교감은 행복이기도 하다.
개인의 내적 행복감 추구는 체념을 부추 키고 불의를 묵인 할 수 있다고도 하지만, 행복의 욕구는 모든 인간에게 가장 큰 본질적인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인간이 추구하는 부(富)와 명예와 우정은 <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들은 그 수단의 노예가 되고 있다. 결국 우리가 바라는 행복은 각자 내면적 현상으로 그 정신작용을 이해함으로 얻는 균형 상태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계절마다 찾아오는 기억들은 그 날이 생일인 분이 직접 산타클로스가 되어 우리에게 주는 선물처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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