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타운 ‘마당국수’ 이흥재, 정자씨 가족
한인타운에 사는 이흥재(55)·정자(51)씨 부부.
식당 ‘마당국수’ 주인인 이들은 망하니까 화합했고, 그래서 감사하다고 한다.
잘 나가던 시절 밖으로 돌던 큰아들 정원(30), 작은아들 정민(26), 막내딸 제니(18)는 지금 가족을 최우선으로 여긴다. 부모가 남모르게 하는 선행에도 든든한 정신적 후원자다. 국수 마는 걸 도맡아 가족이 먹고사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정민씨가 엄마랑 나는 벌고, 아빠는 홀랑 쓴다고 밉지 않은 핀잔을 줄뿐이다.
평범한 이민가정인 이씨 가족에게 불행이 닥친 건 10여 년 전. 79년 이민와 구가한 아메리칸 드림은 4·29 폭동과 함께 덧없이 추락했다. 집과 아파트를 몇 채씩 가졌어도 돈 욕심은 끝 모르던 시절이었다.
전화위복이라던가. 가족이 똘똘 뭉쳤다. 찬 누룽지 밥 먹으면서 마당국수에 들러붙어 일했고, 5년쯤 지나자 기반이 잡혔다. 그 뒤로 이들에겐 이웃이 보이더란다. 백이면 백 나를 위해 쓰던 때보다, 그 중 사십을 남에게 주고 올 때의 기분을 이들은 ‘평화’라고 표현한다.
구세군 자선냄비에 돈을 넣으며 보란 듯 증명사진을 남기는 세상이다. 앞다퉈 돈을 걷거나 이름 깨나 있다는 단체일수록 자선활동을 상품화하는 데 적극적이다. 이씨 가족은 취재를 요청하자 선행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언론에 보도되는 것도 쑥스럽다며 거듭 거절했다. 어렵사리 따낸 인터뷰에서 들은 사연은 이랬다.
이씨 가족이 국수 말아 번 돈의 3분의1은 남들 몫이다. 부자여서가 아니다. 부자 된 다음 돕겠다고 미루면 아까워서 못 돕기 때문이다.
몇 해 전 흥재씨는 성당 묘지의 자리를 9개 사두었다. 일부를 홈리스 등 무연고자나 형편 어려운 이들에게 줬다. 없이 살던 사람들, 죽어서도 갈 곳 없는 게 딱해서다.
옷가지와 식솔들만 남기고 떠난 사람은 장례를 치러준다. 아버지 장례를 치러준 인연으로 만나 열네 살 때부터 매년 1,000달러씩 줘온 소년은 이제 열여덟이 됐다. 올 크리스마스에도 이씨 부부는 이 소년에게 카드 한 장을 쓴다.
아무쪼록 엄마 고생하시는 거 생각해라. 이 돈으로 마약하지 말고, 나쁜 짓 하지 말고, 나중에 크거든 너보다 어려운 이 도우렴
한국을 방문했을 땐 가정형편이 어려운 대학생 형제를 알게 돼 매달 20만원씩, 대학 4년간 부쳤다. 지금은 고향인 충남 공주 지역의 고학생 6명에게 매년 50만원씩 부치고 있다.
지난 98년엔 남가주 충청향우회와 충남 도지사의 주선으로 진행성 척추마비 장애를 앓고 있던 열 다섯 살 이미애양을 초청해 슈라이너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8개월간 집에서 같이 먹고 잤다. 휠체어를 타고 왔던 미애는 걸어서 돌아가 한국서 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한다.
한국의 고학생들은 누가 돈을 보내는지 모르고 있어요. 그냥, 미국에 사는 어느 교포 아저씨라고 알고 있죠. 거 뭐 하러 알립니까. 6년 전 한국에 나가 애들에게 밥 사주는데, 갈비를 처음 먹어본다더군요
처음엔 가족들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미애가 오기 전 흥재씨가 가족회의를 소집하자 아이들은 뜨악해 했다. 아빠는 바쁘다는 핑계로 우리한테 소홀히 하면서, 남한테 잘한다는 건 납득할 수 없다며 장애인 소녀가 오면 단체로 집을 나가겠노라고 했다.
부부는 적잖이 당황했다. 아이들이 이렇게 개인주의로 자랐나, 우리가 교육을 잘못시킨 건 아닐까, 아니면 미국이라는 사회에서 자란 탓인가. 마음이 착잡했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중학교 1학년인 미애, 병약한 그 애가 돌 같은 표정으로 휠체어를 타고 나타나자, 아이들은 간호인 역할을 자처했다고 한다. 딸 제니는 미애의 목욕을 거들고, 한 침대에서 함께 잤으며, 대소변을 받아냈다.
우리 가족에게도 뜻깊은 경험이 됐어요. 아이들이 변했으니까요. 세상에 그늘진 이들도 있다는 걸 자연스레 배우고, 인간미가 깊어졌죠
정자씨는 난 국수 삶기 바빠서 한 일 없다며 남편더러 돈 없애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부창부수다. 결혼한 큰아들 정원씨 가족이 출가한 뒤 집에 방이 남는다며, 한국의 고아원에서 아이 몇을 데려와 돌보고 싶다는 걸 보면.
이씨 가족이 이렇게 된 건 아이러니컬하게도, ‘한순간 다 들어먹은’ 경험 덕이다.
정자씨는 그 전엔 돈 모으는데 혈안이 돼 단 돈 1달러도 기부라고는 없었다고 회고한다. 컨트랙터, 리커 스토어, 미국 식당, 선물가게… 보통의 이민가정이 그렇듯 닥치는 대로 비즈니스를 키웠다.
흥재씨는 컨트랙터로 밤낮 없이 뛰고, 정자씨는 선물가게를 하며 큰돈을 벌던 90년대 초반엔 아파트와 집들을 몇 채씩 가지고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았다. 최고급 옷이 아니면 거들떠보지 않고, 보석으로 치장하며, 하얀색 캐딜락을 타고 폼 내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 때는, 겉은 화려하되 가정은 무미건조한 이율배반의 시간이기도 했다. 흥재씨는 저녁마다 횟집으로, 아들들은 스포츠카를 굴리며 친구들과 밖으로 나돌았다. 애들이 돈 아쉬운 줄 몰라 말만 꺼내면 200∼300달러 용돈은 우습게 타 썼다. 정민씨는 사춘기 시절 ‘한 가닥’하는 또래집단에서 ‘짱’ 노릇을 하며 비비건으로 베벌리힐스의 차 유리를 깨고 돌아다니는 사고를 쳐 1년 간 재판정에 불려 다니기도 했다.
이 아슬아슬한 아메리칸 드림은 일순간 깨졌다. 4·29 폭동 이후 테넌트들이 빠져나가면서 아파트를 차압당했다. 자동차 페이먼트는커녕 마켓도 못 봐 쩔쩔 맬 정도였다.
그런데 희한했다. 돈을 잃자, 가족이 모였다. 재기의 유일한 희망인 ‘마당국수’에 온가족이 들러붙었다. 이민 초창기보다 더 혹독한 생활이었다. 정원씨는 서버로, 정민씨는 주방에서 국수 마는 일을 하며 하루 12시간씩 일했다. 밤 10시 가게를 정리하고 찬 누룽지 밥으로 저녁을 때우면서도 불평 한마디 없었다.
부모님 고생을 그때 처음 알았어요. 1달러 버는 게 얼마나 힘든지도. 하루종일 가족과 부대끼고, 같이 밥 먹고 치우니 유대가 공고해지더라고요 정원씨의 회고다.
그렇게 5년이 지나 기반이 잡히면서 이씨 가족은 도네이션에 눈을 돌렸다. 돈은 있다가도 없다. 없어졌던 돈이 먹고 살만큼 돌아왔으니 남과 나눠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마음이 바뀐 거죠. 돕고 오는 기분은 평화, 그 자체예요
무엇보다 가족의 화합에 대한 감사가 컸다. 천주교인 이씨 가족은 감사를 알게 된 뒤 성당 일에 미쳤다고 한다. 흥재씨는 요즘 수녀원 건립 일에 헌신하고 있다.
정자씨는 ‘사모님’이 아니라 ‘아줌마’다. 국수 삶느라 가게에서 살다시피 한다. 앞치마를 매고 타운을 헤집고 다녀도 창피하지 않다고 했다. 대신 표정은 늘 행복하다. 애들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통하기 때문이다.
고교생 때부터 어깨가 떡 벌어지도록 국수를 말아온 정민씨는 엄마 힘들다고 부채질 해주랴, 팔 주무르랴 그렇게 살가울 수가 없다. 정원씨는 5년 전 LAPD에 지원해 경찰이 됐다.
돈에 대한 집착을 버리니 가족도, 이웃도 보이더라는 정자씨는 24년 이민생활에서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은 사랑이라는 말로 인터뷰를 마감했다. <김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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