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이 8개월만에 당혹스런 몰골로 세상 앞에 섰다. 세상 앞에 세워졌다.
토굴에서 붙잡혀 미군 의무관의 손짓에 따라 입을 떡 벌리고 구강 검사를 받고, 수세미 같은 두발을 고무장갑 낀 손이 이리저리 뒤적이는 동안 무력하게 머리를 내맡기고 있던 그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CNN은 안에서는 안 보이고 밖에서만 안이 보이는 취조실 유리창 앞에 우리 모두를 불러 들이 듯 그의 당혹한 모습을, 그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TV 스크린을 통해 전세계에 내 보내고 또 내보냈다. 철권 통치자, 후세인의 당혹함은 우리에게 당혹이었다.
저 지치고 초라한 노인이 ‘아랍의 자존심’‘이라크의 살라딘’이란 말인가. 반대파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면서 20여년 공포 정치를 폈던 냉혹한 절대 권력자의 기세는 어디로 갔을까. 이라크 국민들을 설설 기게 만들던 권위, ‘서구 제국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지도자’로 아랍 민족주의자들이 추앙하게 하던 권위는 허구였을까.
패전과 도피생활 8개월만에 초췌한 노숙자의 모습으로 나타난 후세인을 보면 무력을 앞세운 권력자들의 권위가 사실은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
‘권위’는 사회의 기본 질서를 유지하는 뼈대이다. 합리적 권위에 대한 인정이 없다면 사회는 거대한 아수라장이 될 수밖에 없다. 가정에서 부모의 권위가 인정되지 않는 다면 자녀훈육이 불가능하고, 직장에서 상사의 권위가 인정되지 않는다면 업무 수행은 불가능해진다. 교통 순경이 교통 정리를 할 수 있는 것은 운전자들이 순경으로서 그의 권위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지위와 제복은 우리가 권위를 인정하게 만드는 대표적인 요인들이다. 문제는 그런 권위들에 우리가 종종 너무 쉽게 굴복을 한다는 것이다. 필요에 의해 권위를 인정하다 보니 나중에는 그 상징물만 보고도 지레 무릎을 꿇는 일이 생긴다.
몇해 전 한 친지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였다. 출국할 날이 되어서 당시 김포공항으로 향하던 중이었는데 그날 따라 길이 너무 막혔다. 잘못 하다가는 비행기를 놓칠 판이었다. 그러자 그를 태우고 가던 운전기사가 느닷없이 갓길로 들어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친지가 놀라서 만류를 하자 기사는 태연하게 말했다 - “걱정 마십시오. 다 괜찮을 겁니다”
운전기사 말대로, 그리고 놀랍게도, 중간에 교통 순경을 만났지만 순경은 아무런 제지도 하지를 않았다고 한다. 이유는 단 하나, 자동차가 벤츠였다. 한국에서 벤츠는 특별한 계층의 상징이었고, 그 계층의 권위에 순경이 지레 주눅이 들어버린 것이 었다.
권위에 눌려 실상을 못보고 눈 뜬 장님이 되어버리는 사태가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이다. 임금이 벌거벗은 것을 뻔히 눈앞에 보면서도 ‘세상에 둘도 없는 귀한 옷’이란 선전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것은 절대 권력자 임금의 권위 때문이다.
후세인 같은 독재자는 질서의 근간이 되어야 할 권위에 무력을 동원함으로써 질서의 숨통을 막아버리는 통치자들이다. 질서 대신 공포로 국민을 복종시켰던 그가 힘의 실체들을 다 잃어버리고 이제 벌거숭이가 되어 나타났다. 권력, 혹은 권위의 근거가 되던 총칼이 사라지는 순간 권위 자체가 사라지면서 세상의 독재자들은 모두 그렇게 스러져갔다. 그들의 권위는 허상이었을 뿐 진정한 권위는 아니었다.
진정한 권위는 마음을 얻을 때 가능하다. 진정한 권위는 마음을 무장해제 시키는 마력이 있다. 요가를 하는 한 친구가 언젠가 고명한 요기를 만났던 경험을 들려주었다. 그의 손을 잡는 순간 갑자기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눈물이 흘러내리더라고 했다.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들을 만나면 종종 경험하는 일이다. 평소 빗장을 단단히 걸었던 마음의 문이 스 르르 열리면서 방어 본능을 무력하 게 만드는 것이 바로 진정한 권위 이다.
때로 그 권위는 2천년이 지나도 빛이 바래지 않는다. 여전히 우리의 마음 문을 열고 영혼의 켜켜에 고인 눈물을 닦아주는 신비로운 권위는 사랑으로만 가능하다. 성탄의 계절을 맞아 영원한 권위를 생각한다.
권정희 편집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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