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세조때 충청도 관찰사 김진지는 의정부와 육조, 승정원 등 중앙의 유력자들에게 뇌물을 돌렸다. 당시 뇌물은 쌀과 콩 등 곡물과 비단, 베를 비롯한 옷감, 지방의 특산물이었다.
뇌물을 얼마나 돌렸던지 정치문제로 비화됐다. 임금이 직접 나서 관찰사를 심문하자, 김진지는 “쌀과 콩을 각각 10말씩 주었다”고 실토했다. 물론 축소 답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증거가 잡힌 이상 뇌물을 받은 고위관리들이 줄줄이 불려들어왔다. 수뢰 혐의로 무릎을 꿇은 정승, 판서들은 한결같이 “하인이 받았지,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했다.
쌀을 지게에 지고 간 사람도 하인이고, 그것을 받은 사람도 하인일 것이다. 고관 대작들의 답변은 거짓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세조는 뇌물을 준 관찰사에게만 중형을 내리고, 뇌물을 받은 고관들은 하인의 잘못으로 돌려 불문에 부쳤다. 왕위를 찬탈한 임금으로서 사대부 계급과 타협하고 싶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뇌물을 받은 자에 대한 형벌은 준 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대했고, 따라서 부패는 갈수록 더해갔다.
한국의 부패는 5천년 역사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깨끗한 관리 ‘청백리(淸白吏)’가 존경받았다는 사실은 관리 사회가 얼마나 썩었는지를 반증하고 있다.
조선 임금은 공공연하게 비자금을 운영했다. 이른바 내탕금이다. 가뭄이 들었을 때 내탕금을 털어 수만명을 구휼했다는 기록은 임금이 얼마나 많은 비자금을 운영했는지를 알 수 있다.
조선시대였다면 대통령의 비자금이 아무 잘못이 없었고, 측근들이 정치자금 모금이 공공연하게 진행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색 당파 싸움으로 날을 지새던 조선 후기엔 뇌물 사건 폭로가 상대당 인사를 죽이는 수단으로 사용됐다. 문종때 이조의 인사권을 쥔 이승손이 일가를 부유한 지역에 군수로 보내 재산을 긁어모았는데, 이조판서였던 권맹손이 이 사실을 임금에게 고해 파직시켰다. 권맹손도 나중에 수뢰혐의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결국은 부패를 척결하기 위해 뇌물 받은 자를 잡아
넣은 것이 아니라, 상대 당파를 무력화하기 위해 정치적 공세를 폈던 것이다. 조선조에는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어 죽는데도 사대부들은 당파싸움에 몰두했고, 정권이 바뀔때마다 상대방 당인들을 엮어 넣을 단골 메뉴가 수뢰 사건이었다.
세월이 바뀌어 민주주의 사회가 되었지만, 한국엔 부패의 고리가 끊어지지 않고 있다. 요즘 연일 터져나오는 정치자금 수수 사건을 보면 마치 영화를 보는 것 같다. 트럭에 배추(1만원권) 상자를 가득 싣고 차떼기를 했던 LG 그룹과 빳빳한 고액 채권을 책처럼 포장해 주었다는 삼성의 수법은 정치자금 전달에서도 세계 정상을 달리는 것같아 씁쓸하다.
뇌물에도 경제 논리가 적용된다. 소액의 뇌물로 거액의 이권을 챙긴다면 이것보다 더 좋은 투자는 없다. 정치자금 수백억원을 주고 수천억원의 법인세 감면 혜택을 얻는다든지, 정권 교체후 오너 가족에 대한 보복이 없다면 검은 돈은 충분히 투자 가치가 있는 것이다.
조선 시대 부패는 주로 관직을 얻거나 자리를 보전하기 위한 매관매직의 수단이었다. 오늘날 대통령과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장 등 주요 공직자를 선거로 뽑으면서, 매관매직은 유력 후보자에 대한 정치자금 지원이라는 형태로 변형된 것이다.
조선조의 가렴주구는 백성들에게 세금을 쥐어짜는 형태로 전개됐다. 하지만 지금은 기업의 비자금이 정치자금의 주요 원천이다. 기업의 비자금 조성은 수익을 감소시켜 주주에 손해를 끼치고, 손실 보전을 위해 생산 제품의 가격을 인상할 때 결국 소비자(백성)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조선의 부패는 왕조의 몰락을 가져왔다. 로마 제국이 부패로 썩어 가던 중 게르만족의 침공에 패망했듯이, 조선조도 임금으로부터 하급관리까지 부패해 사회의 활력이 쇠퇴했고 그러던 중에 일본의 무력 앞에 나라를 송두리째 내주었다. 지금 한국 정치권에 몰아치는 정치자금 폭풍은 한국 역사의 오랜 부패의 뿌리를 잘라내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이번에도 부패를
청산하지 않을 경우 한국은 선진국의 문턱에 올라서지 못하고 영원히 삼류국에 머물 것이다.
김인영(서울경제 뉴욕특파원)
/inkim@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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