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었을 때는 눈이 오면 마치 강아지처럼 거리에 나가 펄쩍 뛰며 좋아했다.
추운 줄도 모르고 친구와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거리를 거닐거나, 밖이 환히 내다보이는 까페에 앉아 클라식 음악을 들으며 따끈한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그런 낭만이 나이가 든 지금도 우리들에게 여전히 남아 있을까? 물론 나이가 들어서도 젊었을 때의 그 기분과 느낌은 누구나
다 있을 것이다. 그래서 노인들이 흔히 말하기를 ‘몸은 늙었지만 마음만은 그대로’ 라고 했지 않았던가.
그러나 오로지 생각일 뿐 현실이 그대로 따라주지 않아 그것이 문제다. 나이가 들고 보니 그렇게 젊었을 때 고대하고 기다려지던 눈이 오히려 귀찮기만 하고 걱정될 때가 많다. 눈이 오면 당장 모든 행동과 활동에 제약이 오게 되고 특히 장사하는 사람들 경우 수입을 걱정해야 하는 문제가 따른다. 요새같이 경기가 계속 좋지 않은 상황에서 오는 눈은 더 더욱 반가
울 리가 없다. 우선적으로 눈이 오면 집이나 가게 앞의 눈을 쓸어내야 하고 거리에 주차해놓은 차까지 눈에서 빼내야 하니 너무나 고생스럽다.
게다가 도보는 말할 것도 없고 차량통행조차 쉽지 않으니 어딜 한번 가려 해도 위험을 감수해야 된다. 시간도 얼마나 걸릴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라 차라리 가만히 집에 앉아있는 편이 대수이다. 이래저래 눈이 오면 아무런 걱정 없는 어린이나 젊은이, 그리고 소금이나 눈 치우는 장비를 파는 제설업자, 또는 세차장 업주라면 모를까 좋아할 성인은 별로 일 것이다.
더군다나 이번에 내린 뉴욕의 폭설은 연말대목의 가장 절정기인 12월 첫 주말에 와서 소매상들의 마음을 더욱 꽁꽁 얼어붙게 만들고 있다. 연중 가장 큰 명절로 소매상들이 대목을 봐야 하는 연말 첫 주말부터 눈이 왕창 왔으니 첫 대목을 놓친 건 당연한 일. 이맘때는 옷이 나가고 물건이 불티나게 팔리고 재고정리도 해야 한다.
그런데 제일 많이 나가는 첫 주말이 폭설로 공쳤으니 소매상인들의 마음이 우울할 수밖에. 달력에는 예년보다 대목 볼 주말이 하루 더 들어있어 소매상인들은 지난 주말을 잔뜩 벼르고 있던 터였다. 이들은 모두
대목을 다 본 12월 마지막 주나 1월에 눈이 와도 좋은데 무엇 때문에 벌써부터 와서 장사를 망치나 하고 한숨을 쉬고 있다.
게다가 맨하탄 한인 소매업주들은 더 하다. 마이클 불룸버그 시장이 ‘복구’ ‘복구’ 하지만 9.11 테러 여파가 심한데다 가게 렌트비와 세금은 천정부지로 치솟아 맨하탄 소매상인들에게 눈은 원망의 대상일 뿐이다. 온갖 세금 인상으로 맨하탄 업주들 경우 ‘이제는 더 못살겠다’며 다른 지역으로 빠져나가는 ‘탈 맨하탄’ 현상이 소리 없이 이는 바람에 이 지역의 델
리, 네일가게를 하는 한인들은 더욱 더 힘든 상태이다. 게다가 네일업계는 전반적으로 지금이 비수기이기도 해 더욱 경기가 어려운 상황인데 눈까지 와서 통행에 지장을 주게 되니 매상에 도움이 될 리가 만무하다.
뉴욕시가 부족한 예산적자를 메꾸기 위해 각종 세금에 대한 인상도 모자라 파킹료, 티켓 벌과금까지 올려대다보니 맨하탄은 10분마다 25전 짜리 쿼터를 넣어야 돼 잠깐 일을 보다보면 ‘아차’ 순간에 벌써 파킹 딱지를 먹는다. 하다못해 잠깐 ‘no standing’에 세워놓았다 걸려도 예전의 20~30달러 짜리 티켓이 이제는 105달러짜리로 둔갑했으니 눈 뜨고 코 베이는 세상이 아니고 무엇인가. 가게도 청소티켓에 한번 걸리면 무조건 50달러, 두 번이면 200달러, 세 번이면 3,000달러, 네 번이면 면허가 취소된다고 한다. 그야말로 어영부영하다가는 합법적으로 시에다 돈을 다 뺏겨버릴 판국이다.
이런 속에서 어디 뉴요커들이 안심하고 눈의 정취를 느낄만한 여유가 있겠는가. 눈이 온다고 좋아하기는 커녕 미리부터 걱정이 앞서고 질리기만 할뿐이다. 옛말에 ‘겨울에 눈이 많이 오면 그 이듬해는 풍년이 든다’고 했다. 일찍이 내린 이번 폭설도 바로 내년의 경기가 풀린다는 최근의 경기전망과 맞물려 이를 알리는 예고탄인가? 제발 그랬으면 좋으련만.
그런 신호라면 앞으로 더 많은 양의 눈이 온다해도 기꺼이 감수하겠다. 지난주 첫눈이 펄펄 내리던 날 한 후배는 이왕에 눈이 오려면 돈으로 둔갑해 펑펑 쏟아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우스개는 우리의 현실을 너무나 잘 반영해주는 것 같아 웬지 마음이 씁쓸하다.
여주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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