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나 공부 안하고 집에 있으면 봉인가
한 전업주부의 항변이다. 한인들은 구역예배다 반상회다 모여서 음식 나눠먹기를 좋아하는데, 직장 다니는 소위 ‘풀타임’ 여자들이 전업주부들에게 요리 떠맡기는 걸 당연시한다는 것이다.
그뿐인가. 전업주부는 ‘(남편만 벌어도 먹고 살 수 있으니) 팔자 좋다’는 암묵적 시선을 견뎌야 한다. 돈 버는 것 외 가정이 돌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잡일이 주부 몫으로 떨어지고, 이중 하나라도 소홀히 했다간 ‘노는 데 그것도 안하고 뭐하냐’며 눈총 받기 십상이다.
이러다 보니 그들 스스로도 요리는 기본으로 잘하고, 밥을 차려도 ‘한 상’ 수준은 돼야할 것 같은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경제권이 남편에게 기울어 치사한 마음을 꾹 참고 ‘삥땅’을 치는가 하면, 부부가 어떤 사안을 같이 결정할 때 남편 입김이 은근히 세게 작용하기도 한다.
전업주부도 바쁘다. 육아에 가사, 기타 온갖 잡일 신경 쓰다보면 우울증이 걸릴 정도다. 아이들에 치이고 시간에 쫓기며 종일 스트레스 받지만 소위 ‘논다’니까 남들 앞에 티도 못 낸다
사실 미국선 아이 키우는 것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니다. 전업주부를 택한 이유는 저마다 다르지만, 적어도 자녀가 어느 정도 크기 전까지 노동의 강도는 유형으로 잴 수 없다.
하루 잠을 4시간 자고, 풀타임이 아니라 ‘오버타임’으로 일한다는 전업주부 최예지(LA·38)씨의 하루를 동행 취재했다.
◇’찍고, 돌고, 또 찍고, 돌고’
최예지씨는 자발적 전업주부다. 패션 디자이너로 14년간 일하다 3년 전 그만뒀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당시 건강이 좋지 않았고, 아이들 교육에 더 신경 쓰고 싶었다.
사실 최씨는 경제적 여건이 받쳐주는 경우다. 육아와 일을 저울질하다 살림이 쪼들리지만 육아를 선택하는 입장과 비교하면 걱정이 적은 셈이다.
그런데도 풀타임으로 일하던 예전 생활과의 비교를 묻자 주저 없는 답변이 돌아온다.
더 바쁘면 바쁘지 덜하진 않아요. 우리 엄마들끼리 하는 말로 ‘찍고, 돌고, 또 찍고, 돌고’라고 하죠. 아침 8시 반쯤 나가 저녁 6시 넘어야 집에 들어오니까 시간으로 따져도 오버타임이고요. 무엇보다 잡일 신경 쓸 게 너무 많고, 자의로든 타의로든 더 완벽하게 하려고 강박적이 되는 것 같아요
그럼 최씨는 종일 뭘 하기에 그렇게 종종걸음을 치는 걸까.
우선 그녀는 하루를 자신을 위한 시간, 자녀와 남편을 위한 시간, 집과 가사를 위해 쓰는 시간으로 각각 분류한다. 자기 계발을 위해 뭔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인데다 아이들 보내고 뒤돌아서면 시간이 후닥닥 가버려 아깝다는 설명이다.
그래서 그녀는 세인트 제임스 초등학교 6학년인 딸 네이딘과 3학년인 아들 조나단이 학교 가고 난 오전 시간을 이용해 한의학을 배운다. 파트타임 학생인 셈인데, 목적은 아이들이 크고 전업주부와 굿바이할 때 쓰기 위한 보험 차원이라고 한다. 그러니 내가 자청한 그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으려면 다른 시간에 전투적이 될 수밖에 없다고 그녀는 말한다.
◇시간에 쫓기는 동선 고민
아침 6시 반. 최씨의 하루는 두 아이를 깨우고 도시락 싸는 일부터 시작한다. 아이들 등교 준비를 채근하면서 전날 저녁 만들어둔 기초 재료들로 도시락 2개를 싼다. 문제는 네이딘과 조나단의 식성이 영 딴판인 것. 아들은 한식 체질인데 딸은 샌드위치 등 양식을 좋아해 밥과 빵 둘 다 하려니 메뉴 짜는 것도 이만저만 고민이 아니다. 맘 같아선 차라리 돈 내고 학교 급식을 먹이고 싶은데 맛없다 불평하니 그럴 수도 없고….
아무튼 도시락과 아침식사부터 휘둘리면서 하루를 열면,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는 건 남편이 맡는다. 최씨도 9시까지 수업에 가야하기 때문이다. 공부한 지 3년이 다 돼 가건만, 파트타임으로 짬 내 하다보니 수료의 길이 멀다. 그래서 이번 학기는 바짝 좀 하려 했지만 오후 시간이 아이들에게 매여있어 그럴 수도 없다.
주중 월·목·금요일은 수업, 화·수는 인턴을 하고 나면 오후 1시. 이때부터 아이들 픽업하는 3시 반까지는 ‘찍고, 돌고’가 반복된다. 타운과 다운타운 등을 돌며 마켓, 세탁소, 은행 등에 들러 갖은 잡일을 해결하고, 하다 못해 액자를 맞추거나 오피스디포에서 컴퓨터 종이를 사며, 애들 약 지은 것 픽업하고, 비디오 샵에서 드라마 빌리는 것까지-.
점심 먹고 난 후 이 2시간 여 동안 ‘어느 일이 얼마나 걸릴 것인가, 어떻게 동선을 조정해야 펑크 안내고 시간을 가장 효율적으로 쓸 수 있을까’ 고민하다보니 머릿속은 늘 복잡하다.
게다가 최씨는 취향도 까다로워 일을 찾아서 하는 스타일. 가령 장을 봐도 고기는 이 마켓이 좋고, 야채는 저 마켓이 좋고 하는 식이다. 설상가상으로 남편과 애들 둘의 식성이 다 달라 저녁거리를 메인만 보통 2∼3가지씩 짜낸다고 한다.
갈비나 스테이크는 아르헨티나 마켓에서, 삼겹살과 차돌은 상록수에서 사요. 야채는 한국 마켓, 드링크·휴지 같은 잡화는 스마트&파이널, 소스는 일본 마켓이고. 왜냐고요? 물건이 좋거나 가격이 싸니까요
◇자녀 픽업
그렇게 콩튀듯 다니다 3시 반이면 어김없이 아이들 픽업 대열에 줄을 선다. 두 아이가 같이 끝날 때도 있지만 어느 날은 하교시간이 달라, 한시간 간격으로 행콕팍 인근의 집과 학교 길을 오락가락 하기도 한다.
이때부턴 아이들 방과 후 활동 시작이다. 네이딘과 조나단은 수영·태권도·바이올린·첼로 등 운동과 악기를 한가지씩하고 있는데, 애들을 때맞춰 데려다 주고 데려오는 일이 장난이 아니라고 한다.
그래도 저는 덜 시키는 편일 걸요. 어떤 엄마들은 주 7일 애들을 ‘돌려서’ 애들이 코피를 다 쏟는대요. 그건 일부겠지만, 저 정도면 극성이라고 하기도 뭐해요
그렇게 왔다갔다하는 짬짬이 뭐라도 하면 좋으련만, 최씨 표현에 따르면 이 시간은 참 ‘어중간’하다. 장을 보는 등 뭔가 매듭짓기엔 짧고, 기다리자니 아깝고 무료하다는 것. 그래서 최대한 시간을 쪼개 볼일을 보거나 이럭저럭 때우고 아이들과 함께 집으로 오면 6시가 넘기 일쑤다.
오자마자 애들이 샤워와 숙제를 하는 동안 저녁상을 2∼3개씩 차려낸다. 가족들 입맛이 까다로운데다, 남편이 집에서 먹는 걸 좋아하고, 밖에서 외식을 하면 집에 와 또 먹는 스타일이라 최씨는 요리에 치여 산다. 물론 이 분주한 와중에도 아이들에게 공부해라, 악기 연습해라 잔소리는 빠지지 않는다고 한다.
저녁 먹고, 치우고, 다음날 아이들 도시락 재료 준비까지 후닥닥 하고 나면 밤 9시. 가족이 다같이 동네 한바퀴 산책하는 시간이다. 하루 중 운동이라곤 이때가 전부다. 최씨는 ‘시간 없어 운동 못하는 전업주부’인 셈이다.
◇스트레스 해소
야밤은 다시 최씨가 자신을 위해 쓰는 일부분이다. 주로 남편과 함께 비디오를 보는데 매일 최소 1편에서 내키면 3∼4편까지 섭렵한다고 한다.
최씨는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법이라며 신경 쓰는 게 많아서인지 잠을 4시간밖에 못 자도 스트레스는 풀어야한다고 강조한다. 틈틈이 학교 공부하고 청구서 정리 같은 소소한 일도 해야하며, 시험이 닥치면 수험생이 되기도 한다.
뿐이랴. 손님 청해 음식 나누길 좋아하는 최씨는 2∼3주에 한번은 손님치레를 한다. 며칠 후에도 손님 30명이 오기로 돼 있어 벌써부터 음식 장만에 집안 청소에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다.
하루하루가 대충 이렇게 돌아간다는 최씨는 생활권이 다 한인타운에 몰려있어도 이렇게 빡빡하다며 전업주부가 한가하다는 생각은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편견이라고 말했다.
<김수현 기자> soohkim@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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