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사는 친구 중에 정치가의 아내가 있다. 현직 정치인인 그 남편이 지난 봄 앨러지로 두어달 고생을 했다고 한다. 다른 직업의 사람들 같으면 재채기 나고 열 나고 콧물이 줄줄 흘러 불편한 증상들이 제일 문제이겠지만 그에게는 더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었다. 친구가 말했다.
“정치하는 사람은 너무 오래 아픈 것도 안 좋거든”
바로 이미지의 문제였다. 리더십과 카리스마를 기본으로 삼는 정치인이 지역구민들 앞에서 계속 골골거리는 모습을 보이면 믿음직스런 지도자 상에 흠이 가기는 할 것이다.
‘터미네이터’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캘리포니아의 새 주지사로 당선이 되었다. 평생 정치를 업으로 삼던 그레이 데이비스 주지사가 소환되고, 동네 정치도 해본 적이 없는 슈워제네거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국가 단위로 봐도 경제 규모가 세계 5위인 거대한 자치단체의 통치를 유권자들은 무경험의 비전문가에게 덜컥 안겨 줘 버렸다. 순조롭게 굴러가도 버거운 살림일텐데, 목을 조여오는 재정 적자, 바닥으로 가라앉은 경제, 치솟는 실업률 등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행정경험이 전무한, 그래서 자질도 능력도 정치철학도 미지수인 그에게 캘리포니아 주민들은 무얼 믿고 자신들의 배의 선장 직을 맡겼을까.
주류 신문의 한 칼럼니스트는 캘리포니아와 슈워제네거의 결합을 데이트 첫날 라스베가스로 직행해 결혼해버린 부부 같다고 표현했다. 상대를 겪어 보고 사귀어 볼 겨를도 없이 만나자마자 결혼했다면 짐작되는 이유는 한가지뿐이다. 첫눈에 반한 것이다.
‘첫눈’은 ‘내용’이 아니라 ‘이미지’이다. 캘리포니아 유권자들은 정치인, 슈워제네거가 아니라 불가능이 없는 초인적 존재, ‘터미네이터’에게 표를 던졌다고 할 수도 있다. 이유야 어떠하든 깊은 수렁에 빠진 캘리포니아를 건져내 쇄신하고, 개혁하고, 활기를 불어넣을 강력한 지도자의 이미지를 유권자들은 액션 스타, 슈워제네거에게서 본 모양이다.
몇 년전 한국의 친지가 미국에 와서 몇 달을 지낸 적이 있었다. 미국생활의 어려운 점들을 이야기하던 중 그가 이런 지적을 했다.
“미국은 너무 선택해야 할 것이 많아요. 하다 못해 비누, 샴프 만해도 너무 종류가 많으니 그 중 하나를 고르는 것도 일이더군요”
그러고 보니 나도 처음 미국에 와서 같은 경험을 했었다. 그리고 어떤 경로를 통해 샴프, 비누, 치약, 주스, 화장지 등 각 생활용품 마다 브랜드를 하나씩 골라 지금까지 쓰고 있는 데, 이것저것을 다 써보고 제일 좋아서 고른 것은 물론 아니었다. 때로는 친지의 권유로, 때로는 광고를 보고, 혹은 포장이 마음에 들어서 … 이유는 여러 가지이지만 선택의 기준이 내용이라기보다는 주로 인상, 이미지였다. 그런 비합리성을 겨냥하는 것이 광고이다.
미국에서 ‘광고계의 피카소’로 꼽히는 인물로 클로드 홉킨스라는 사람이 있다. 20세기 초반의 사람인데 그의 광고는 기본적으로 한가지 출발선에서 시작한다. “사람들은 양떼와 같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꽤 냉정하게 사물을 판단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누군가 제시해주는 인상에 크게 의존한다는 점을 그는 꿰뚫고 있었다.
같은 접근법이 정치에 적용되기 시작한 것은 미국에서 1960년대부터였다. TV를 통한 이미지로 제일 처음 덕을 본 인물이 존 F. 케네디라면 정치인의 이미지의 중요성을 일찍이 깨달은 인물로는 리처드 닉슨이 꼽힌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1960년 대선 캠페인 때 하루는 케네디 후보가 해변을 거니는 장면이 보도되었다. 바닷가를 무심히 걷는 미남 정치인의 모습은 그 자체로 여성 유권자들에게 어필했다. 닉슨도 같은 장면을 찍고 싶어 사진기자들을 해변으로 불러모았다. 하지만 닉슨은 아무리 애를 써도 케네디 같은 분위기가 살아나지를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닉슨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PR, 광고, TV 전문가들을 보좌관으로 기용해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이미지를 전략적으로 만들어냈고 그 결과로 1968년 대선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진짜 닉슨과 대외 홍보용 이미지 속 닉슨 사이의 괴리는 워터게이트 사건 때 여실히 드러났다.
이미지가 내용을 앞서는 시대는 불안하다. 정치만이 아니다. 얼마전 중국에서는 외모 때문에 취직이 안되던 20대 여성이 성형수술을 하고 나자 취직이 되었다는 뉴스가 화제가 되었다. 포장 대신 속을 들여다보는 진지함이 사라지고 있다.
권정희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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