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신문사 동료 중에는 요즘 딸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이 핑 도는 여직원이 있다. 친구처럼, 자매처럼 늘 조잘조잘 대화가 많던 딸이 대학에 입학해 집을 떠났다. 딸 없는 집에 산지 10여일 - 근무 시간에는 잊은 듯하다가도 집에만 가면 딸 생각에 가슴이 저민다.
“딸이 멸치볶음을 좋아해서 멸치를 볶다보면 중간에 절반은 없어지곤 해요. 옆에서 자꾸 집어먹거든요. 어제는 멸치를 볶는데, 아무도 집어먹는 사람이 없더군요”
가슴이 싸- 하고, 휑- 하며, 커다란 구멍이 뚫린 듯 허전한 느낌 - 자녀가 대학으로 떠나고 ‘빈 둥지’에 남은 부모들의 감정상태이다.
해마다 9월이면 미국에서는 수십만의 부모들이 병 아닌 병을 앓는다. 빈 둥지 증후군이다. 2년 전 둘째 아이가 진학하면서 ‘빈 둥지’의 여주인이 된 한 주부는 ‘이상함’을 첫 느낌으로 꼽았다.
“집안이 갑자기 너무 조용한 거예요. 말 소리도 없고, 음악 소리도 없고, 하루종일 울리던 전화벨은 뚝 그치고, 컴퓨터 게임 소리, 냉장고문 여닫는 소리도 없고… 소리뿐이 아니에요. 발에 걸리던 옷가지도 없고, 내던져진 책·책가방도 없고, 헤어 젤, 헤어 스프레이 어지럽던 화장실 세면대는 단정하게 비어있고 … 어디 다른 세계에 간 듯 이상한 느낌이었어요”
이어 학교 끝날 시간이면 무의식적으로 아이가 집에 잘 들어왔는지, 숙제는 하고 있는지, 시험은 없는지 … 챙기고, 주말 저녁이면 밖에 나간 아이가 별 일 없는지, 귀가 시간을 지키는지, 촉각을 곤두세우게 되지만, 돌연 깨달아 지는 것은 그렇게 감독할 아이가 없다는 사실이다. 텅 빈 공간, 텅 빈 시간, 텅 빈 마음 - 자녀가 떠난 자리이다.
그 빈터에서 어떤 삶을 일궈낼 것인가가 부모들의 숙제이다.
‘빈 둥지’의 주인들은 대개 두 가지 문제에 부딪힌다. 부부사이의 관계, 그리고 부모로서, 특히 엄마로서 정체성의 문제이다. 남매가 차례로 북가주의 대학으로 떠난 후 한 친지가 말했다.
“남편과 매일 둘이 마주 보고 있으니 무척 싸우게 돼요. 하다 못해 치약 짜는 습관, 화장실 휴지 걸어두는 버릇을 가지고도 싸웠지요. 20여년 살면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던 사소한 것들이 다 싸움의 발단이 되더군요”
“왜 이렇게 많이 싸울까” 생각해보니 그간 완충역할을 하던 아이들이 없어진 때문이더라고 그는 말했다. 아이들 키우기 바빠서, 아이들에 온 신경을 쏟느라 뒷전으로 밀려있던 부부간의 문제가 보호막 없이 적나라하게 시험대에 오르는 것이 ‘빈 둥지’이다. 하지만 처음 의 적응 기간이 지나고 나면 “애틋한 정이 새록새록 솟아나면서 제2의 신혼이 된다”고 많은 부부들은 말한다.
정체성의 문제는 주로 여성들에게서 한동안 심각하다. 20여년 자녀를 중심으로 모든 관심과 에너지, 시간을 쏟다가 갑자기 그 대상이 사라지고 나면 여성들은 허탈감에 빠진다. 인생의 절반, 성인이 된후 거의 전부를 ‘엄마’로 살다가 “이제 엄마 노릇이 끝났구나 생각하니 껍데기만 남은 느낌”이라는 주부들이 많이 있다. ‘엄마’ 대신 ‘나’로 삶의 무게 중심을 바꾸는 과정이 필요하다.
‘빈 둥지’는 상실이자 해방이다. 조마조마하고 불안한 10대를 무사히 통과시켜 아이들을 성년의 배에 태워 보내고 나면 부모로서 1차적 의무는 완수한 것이다.
50살 전후로 ‘빈 둥지’의 주인이 되고 나면 여생을 즐길 수 있는 기간은 대개 20년 정도. 온전히 내 것으로 돌아온 시간과 자유, 에너지를 투자해 뭔가를 거두기에 충분한 기간이다. LA의 주부 K씨가 좋은 예이다. 남편 뒷바라지하고, 남매 키우며 평범한 주부로 살았던 그는 몇 달 전 법과대학을 졸업했다.
“4년전 아이들 다 내보내고 나니 내 남는 에너지로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것저것 궁리를 하는데 남편이 법학 공부를 권했어요”
“이 나이에 할 수 있을까” 주저했지만 남편이 옆에서 용기를 주었다. 마라톤 뛸 때 옆에서 같이 뛰어주는 사람 역할을 자처하며 남편이 같이 입학을 했다.
“100명이 입학했는데 1년 지나면 절반을 떨어트린다고 하더군요. 그 절반에 들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공부하다 보니 아이들 보낸 허전함은 생각할 겨를도 없었어요”
뒤늦은 학업은 그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자신감, 엄마에 대한 자녀들의 자부심, 그리고 같이 공부하며 더욱 돈독해진 부부애 등이다.
자녀가 떠난 빈 둥지 - 제2의 인생을 시작할 무대이다.
권정희 편집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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