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미국에 왔을 때 미국 여성들이 우리와 다른 점 두가지가 금방 눈에 띄었다. 흑인 백인 할 것 없이 여자들이 반드시 하고 다니는 것 두가지가 있었는데 바로 향수와 매니큐어였다.
21년전 내가 떠나올 때 한국에서는 그런 사람이 거의 없었으므로 매우 생소하고 신기하였으며 앞으로 미국에 살려면 나도 그렇게 해야되는 것 같아 따라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백화점에서 수많은 향수를 뿌려본 후 가장 마음에 들어서 택한 향수를 지금까지 바꾸지 않고 사용하고 있다. 일단 마음에 맞는 것은 좀체 바꾸지 않는 성격 탓도 있지만, 미국의 화장품 회사들이 한번 나온 제품을 오래도록 바꾸지 않는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네일 폴리시는 잘 되지 않았다. 우선 나의 엄지손톱이 못 생긴 것이 큰 이유였다. 다른 손톱들은 괜찮은데 엄지만은 납작하고 짜리몽땅하여 매니큐어를 바르면 오히려 우스꽝스러웠다. 혹자는 이런 엄지를 보고 ‘돈 세는 손’이라고도 하고 ‘재주 많은 손’이라고도 하는데 순전히 위로 차원에서 지어낸 말인 것 같다. 돈을 센다고 할 정도로 많이 가져본 적도 없거니와 이 손으로 특별히 신통하거나 재주있는 일을 하지 못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손톱도 이런데다 매니큐어는 바르기가 쉽지 않고, 마를 때까지 손을 벌 세워야하며, 며칠 지나면 벗겨지면서 지저분해지는 탓에 애시당초 포기하고 말았다. 가끔씩 다른 여자들이 예쁘게 가꾼 손톱을 보면 나도 그렇게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실천해본 일이 없고 여름이면 샌들을 신기 위해 발톱에나 칠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지난 일요일 웨스트 LA의 베벌리 길을 지나면서 네일 살롱이 몇 개나 연속적으로 눈에 들어왔다. 순간 즉흥적으로 손톱발톱이나 칠해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중에 정기적으로 네일샵에서 손질하는 친구들이 몇 명 있는데 갑자기 그 흉내를 내고 싶어진 것이다. 손톱을 그렇게 칠하면 밥할 때 괜찮냐고 물어볼 때마다 전혀 상관없다고 주장한 친구들 말도 확인할 겸.
창문에 쓰여진 전화번호를 보고 걸어서 물어보니 손톱발톱 다 하는데 18달러란다. 가격도 부담스럽지 않군. 그래, 맨날 밥하고 설거지하고 기사 쓰느라 고생만 한 손, 공주처럼 호강 좀 시켜주자. 그 즉시 집으로 달려가 남편과 아들에게 이른 저녁식사를 차려주고 다시 뛰쳐나왔다. 이런 일은 마음 변하기 전에 저지르고 봐야하니까.
자그마한 살롱이려니 생각하며 들어선 그곳에서는 그러나 놀라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양쪽 벽으로 죽 설치된 작은 탁자와 의자마다 손님이 모두 앉아 있었고 열두명이나 되는 여자들이 매니큐어와 페디큐어 서비스를 받고 있었다. 일요일 오후 5시반, 거의 문 닫을 시간이 되었는데도 살롱은 서비스하는 여자, 서비스 받는 여자들로 잔뜩 붐비고 있었다.
손님들은 모두 백인여성이었고 이들의 손과 발을 주무르는 여성들은 모두 베트남 여성이었다. 네일 비즈니스가 베트남 이민자들의 주 업종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녀들은 한국 여성들과 비슷한 점이 많아 보였다. 자그마하고 민첩하며 손재주 좋은 여자들이 투박한 베트남 말을 주고받으며 쉴 새 없이 왔다갔다하는 모습이 생활력 강한 한국의 또순이들을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20여분을 기다린 후 시키는 대로 먼저 발을 따뜻한 비눗물에 담그고 얌전히 앉아있었다. 곧 이어 스무댓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다가와 발톱을 깎고, 다듬고, 발톱밑의 때까지 말끔히 제거한 후 네일 컬러를 칠했다. 그 다음엔 또 다른 여성이 찾아와 손톱 정리를 시작했다. 작은 보울의 비눗물에 손을 담그게 했다가 깨끗하게 다듬은 다음 매니큐어를 칠해주었다.
약간의 손발 마사지가 포함된 서비스는 30여분만에 놀라운 속도로 끝났다. 연한 핑크로 칠해진 손톱과 짙은 베리색이 깜찍한 발톱을 바라보며 나는 귀부인이 된 기분이었고 손놀림도 우아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공주 흉내를 내보려던 나의 작은 허영심은 살롱을 나서는 순간 와르르 무너졌다. 손톱이 다 마른 줄 알고 핸드백 속에 손을 넣고 자동차 키를 찾느라 한번 휘젓고 나니 기껏 바른 네일 컬러가 다 망가져 버린 것이다. 그 허망함이라니! 집에 돌아와서 보니 양쪽 새끼발톱도 샌들에 끼여 엉망이 되어 있었다.
공주는 아무나 하나. 팔자에 없는 매니큐어, 다시 네일 살롱에 갈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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