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사디나 장현섭씨 패밀리 24명
9순 노부모 위한 ‘효도 나들이’1
런던·파리등 8박9일… 총경비 5만여 달러
패사디나에 사는 장현섭(47), 경수(43)씨 가족은 지난 8월 모처럼 가슴 뻐근한 휴가를 보냈다. 난생처음 6남매가 합심해 나이 아흔을 바라보는 노부모를 모시고, 자녀들까지 동반해 3대 24명이 함께 유럽 여행을 떠난 것이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부모 살아 생전에, 걸어다닐 수 있으실 때 하자”고 가족 중 누가 제안했고 또 누군가 전체경비 부담을 자처, 불을 질렀다고 한다. 이에 감동 받은 ‘장씨 패밀리’ 개개인의 노력도 상당했다. 미국 사는 형제들은 부부가 같이 들러붙어 일하던 ‘맘 앤 팝’ 비즈니스를 9일간 남에게 맡겼고, 무릎이 좋지 않은 서울 큰누나는 잘 걸어야 한다며 관절 수술을 받았다. 또 인도나 뉴욕 등 타지에 사는 일부 조카들은 현지 합류 일정을 짜는 등 글로벌 조직력을 보였다. 이 같은 준비 끝에 장철홍(88), 정희(78)씨의 총 자손 30명 중 최근 새 직장을 구해 휴가가 없거나 지난 6월 출산해 산후조리 중인 조카 가족 등 6명을 제외하곤 전부 참가, 장씨 패밀리사의 한 페이지를 썼다. “가족 간 유대가 끈끈해진 게 가장 큰 수확”이라는 현섭씨에게서 일정 짜기부터 대가족이 움직이면서 겪은 에피소드, 노부모와 3대 손자손녀들의 여행기를 들어봤다.
여행 제안이 나온 건 지난 5월이었다. 장씨 패밀리 중 한사람이 “아버지 어머니가 내년이면 아홉수인데 아직 정정하실 때 다 같이 여행 한번 갈까”하고 운을 뗐다.
남매들도 각자 가정꾸리고 먹고살기 바쁘다 보니 명절 때 만나 밥 한 그릇 먹고 헤어지는 사이가 돼버렸는데, 간만에 뭉쳐보자는 얘기가 솔깃했다. 그러나 말이 쉽지 사람이 몇인데 경비하며, 다들 스몰 비즈니스하면서 식구대로 갈 수 있나, 흩어져 사는 애들은 또 어떻게 모으고…
불가능해 보였던 이 제안은 가족 중 한사람이 경비를 부담하겠다고 나서면서 불이 붙었다. 설마 했던 남매들은 ‘줘도 아깝지 않고 받아도 미안하지 않은’ 것이 핏줄이라는 걸 확인한 뒤 여행 준비에 가속을 내기 시작했다.
우선 인원이 많고 노부모와 아이들까지 있다보니, 타운 여행사 패키지를 이용하는 게 좋을 성싶었다. 행선지는 유럽. 부모님이 한번 다녀온 곳이지만 가족 전체로 보면 안 다녀온 사람 많아 목적지로 낙찰했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를 돌아보는 코스였다.
여행 일정은 아이들 개학 전인 8월 7일부터 15일까지 8박 9일로 정했다. 단체여행 명목으로 10% 할인 받아 여행사에 지불한 돈은 4만6,000여 달러. 현지서 에펠탑에 올라가는 것과 곤돌라 타는 것, 가이드 팁 등 옵션 비용이 추가 지출돼 총 경비는 1인당 250여 달러씩 더 들었다.
일정이 확정된 뒤 미국 내에서도 뉴욕, 나파 밸리, 샌프란시스코 등지에 흩어져 사는 가족들과 한국 친지들, 인도에 선교차 나가있는 조카 등에게 영국 도착시간을 타전했다. 현지서 바로 합류하기 위해서다.
미국 사는 형제들은 부재 중 맘놓고 비즈니스를 맡길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맘 앤 팝 업소가 대부분인데, 부부와 아이들이 다 가니까 천상 남한테 맡겨야 했다. “못 찾으면 문 닫고라도 가겠다”고 할 정도로 다들 열성을 내면서 여행 준비는 착착 진행됐다. 결국 지난 6월 둘째를 출산, 해외여행이 무리인 조카와 새 직장에 입사해 휴가를 낼 수 없는 조카 가족을 제외하곤 24명 전원 참가했다.
현섭씨는 “하마터면 출산한 조카네 두 살배기와 갓난애까지 4대가 모일 뻔했다”며 “매부의 성을 따라 ‘디아즈’인 막내 동생 가족을 빼곤 성씨가 전부 장씨라 여행지에서도 화제가 됐다”고 한다.
◇에피소드… 에피소드
그 많은 가족이 유럽 땅에서 움직이는데 에피소드가 없었을까.
사건은 영국 도착 직후 터졌다. 히드로 공항에 내린 뒤 화장실에 간 아버지가 사라진 것.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가족들은 공항을 헤집고 다녀 20분만에 아버지를 찾았다. 그 뒤론 손자손녀들이 돌아가며 할아버지 당번을 정해 화장실 갈 때마다 동행했다. 평소 명절 때 모여도 조부모는 멀고 높은 어른이기만 했던 아이들이 스스로 이런 아이디어를 내 할아버지를 보필하는 것을 보고 장씨 남매들은 “자연스럽게 패밀리 유대감이 생겼다”며 흐뭇했다고 한다.
영국서 프랑스로 가는 해저기차에선 말 그대로 이산가족이 됐다. 기차가 모두 18칸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좌석표가 첫 번째 칸과 열 여덟 번 째 칸으로 갈린 것이다.
“이런 줄도 모르고 가이드를 따라 움직이다 절반이 실종되자 한바탕 난리가 났어요. 끝과 끝으로 나뉜 ‘챙’(Chang)들을 확인하고야 폭소했죠”
사람이 많아서 생긴 일들은 또 있다. 노인과 애들이 섞인 24명이다 보니 출발과 도착 때마다 인원 확인이 필수였는데, 결국 고안해낸 아이디어가 자기 번호를 정하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1번”, 어머니는 “2번” 하는 식으로 해서 막내 동생 숙경(42)씨의 막내딸인 6살짜리 클라라가 영어로 “24”를 외치면 다음 행선지로 움직이곤 했다.
아이스크림이나 물 내기도 했다. 매번 한두 사람이 늦게 와 출발시간이 지연되자 벌로 정한 것이다. 한번은 현섭씨 부인인 경수씨가 늦었는데, 미국 돈으로 2달러50센트씩 하는 물을 24병 돌리니까 한번에 75달러나 들었다. 현섭씨는 “두 번쯤 하고 나자 지각생이 싹 없어졌다”고 전했다.
다음 에피소드는 화장실. 단체 여행은 화장실 가는 시간이 정해져 있어 “10분 간 다녀오세요”를 주문 받는 경우가 많은데, 매번 시간이 초과돼 애를 먹었다. 특히 여자들은 줄을 늘어선 여자 화장실이 여의치 않아 종종 남자 화장실을 써야 했다.
한 집안이라도 각각이라는 종교와 정치 얘기도 그렇다. 어느 시점에서 “종교 얘기는 하지 맙시다”라고 룰을 정하게 됐다. 아버지는 감리교, 남편이 목사인 누나 숙녀(63)씨는 장로교, 큰 형 한섭(65)씨는 안식교인데, 종교란 게 절대적이어서인지 토론으로 시작했다가도 감정 상하는 일이 종종 있기 때문이다. 장씨 패밀리의 경우 정치 성향은 비슷해서 문제가 없었지만 깊이 있는 종교 얘기는 미리 삼갔다고 한다.
◇여행 후기
“지금껏 살면서 아버지가 그렇게 좋아하시는 것 처음 봤어요”
현섭씨는 베니스에서 곤돌라 타던 때를 떠올리면 가슴이 먹먹해온다고 했다. 24명이 4대에 나눠 타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가는데, 곤돌라 사공이 아베마리아, 산타루치아 등 귀에 익은 노래를 부르자 손뼉을 치며 좋아하셨단다.
고향 황해도서 교장으로 재직하던 아버지는 평소 무뚝뚝할 정도로 감정 표현이 적은 스타일. 그러나 이날은 곤돌라에서 내린 뒤에도 식사를 못할 정도로 벅차해 오히려 자녀들이 놀랐다고 한다. 아버지는 1·4 후퇴 때 밥 먹다 말고 피난 내려오느라 부모와 생이별했던 얘기를 하시며 “나는 그렇게 못했는데 너희들이…”라는 말로 그간의 한을 푸는 듯 했다.
현섭씨는 “연세가 여든 여덟이나 되지만 그 넓은 대영 박물관에서도 한번 쉬지 않고 걸을 만큼 여행을 즐기셨다”며 “동행한 자녀들 모두 뿌듯했다”고 한다.
“이런 대가족 여행은 관광지 자체보다 가족끼리 같이 생활하면서 느끼는 즐거움이 훨씬 크더라”는 현섭씨는 “계 부어 다음에 한번 또 갈까”라며 후기를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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