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면서 밥해먹기’란 책을 누가 추천하길래 사다 읽었다.
‘기자경력 23년의 씩씩한 아줌마 김혜경에게 배우는 스마트 쿠킹 노하우’라고 쓰여있는 부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오랫동안 바쁜 신문기자로 일하면서도 가족의 저녁상만은 매일 직접 차렸다는 여성이 자신의 ‘머리좋은’ 부엌살림 노하우를 소개한 책이다.
내게 이 책을 추천한 사람은 내가 그녀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제발 비슷해지라고 읽어보란 것이었을까? 그런데 일단 표지와 머릿글부터 슬슬 나의 신경을 건드리기 시작한다.
“매일 저녁 퇴근길, 근사한 밥상 차려놓고 사라지는 우렁각시를 꿈꾸는 이 땅의 워킹우먼 여러분! 우렁각시가 없다면 씩씩하게 밥해먹고 다닙시다. 식사준비는 단 30분에 끝내는 스마트 쿠킹 노하우로 말입니다. 머리 좋은 여자가 요리도 잘 한다잖아요”
“보통 머리는 공부나 회사 일할 때나 쓰고 집안 일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손이 가는 대로 맡겨두면 다 되는 걸로 생각하기 쉽죠? 그런데 살림 역시 머리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꾸려가기 힘든 것이더군요...제가 지금부터 소실대탐의 지혜를 빌려 드릴게요”
어마마, 이 아줌마 잘난체 되게 하네. 잘난체라면 나도 ‘한 잘난체’하는 사람인데 책에다 대놓고 자기가 머리 좋은 여자라니, 좀 심하잖아 이거! 아니꼬운 감정을 억누르고 읽어보니 그러나 과연! 살림의 지혜가 경이롭기 그지없기는 하였다.
김혜경씨가 전하는 30분만에 따끈한 밥상 차리기를 제목들만 요약해보면 이렇다.
“식단이 간단해야죠. 국, 찌개를 포함해서 두가지, 많아야 세가지 이상 새로운 반찬을 하지 않습니다. 반찬은 두 번 먹을 양으로 만들어서 절반은 먹고 나머지는 담아두었다가 다음날이나 하루 걸러 먹습니다. 2주일에 하루는 장을 보고 식량 비축을 위해 투자합니다. 고기도 양념하고 생선은 밑간해 두어서 금방 해먹을 수 있도록 손질하는거죠. 음식에 너무 많은 재료를 넣지 마세요. 시간도 많이 걸리고 네맛도 내맛도 아닌 요리가 되거든요. 식사준비를 단축할 수 있는 주방도구나 식품에 과감히 투자하세요. 일주일에 하루는 먹다 남은 반찬을 모조리 몰아서 처리하세요. 인스턴트 식품과 친해지세요...”
그런데 기자였다면서 어떻게 그렇게 살림할 수 있었는지는 좀 의구심이 들었다. 저자는 한국경제신문, 스포츠서울 기자를 거쳐 여성잡지 ‘파르페’와 ‘퀸’의 편집장으로 일했다는데 도대체 기자생활을 어떻게 했길래 매일 저녁 밥상을 자기가 차렸다는 것일까, 솔직히 말하면 이해가 잘 안 가고 사실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겨졌으며 이것이 과연 진짜 경험담인지, 책을 만들기 위해 초를 좀 친건지 의심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도 벌써 20년째 신문사에 몸담아온 기자이므로 변명삼아 말할 수 있지만 기자는 365일 24시간 업무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기사와 마감 스트레스 같은 기본적인 부담은 접어두고라도, 우선 시간적으로 규칙적인 밤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이 기자들이다. 한달에 야근 몇번, 주말당직 한번, 이따금씩 저녁 취재도 있고 때에 따라 회식도 있으며 신참시절엔 큰 사건이라도 터지면 시간을 가리지 않고 튀어나가야 하는 것이 남자 여자를 가리지 않는 기자생활인데, 그것도 미국이니까 이만하지, 한국에서의 기자생활이 더 험하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는 바 아닌가.
그러나 내용의 사실 여부는 접어두고 ‘일하면서 밥해먹기’란 책은 워킹 마더들이 한번쯤 읽어보면 살림에 도움이 될만한 책이란 점은 인정해야겠다. 또한 그저 비슷한 정보의 나열이 아니라 기자의 센스를 갖고 직접 살림해본 사람의 지혜와 노하우가 담겨있기 때문에, 너무 화려하고 멋있어서 식탁에서 겉도는 요리책이 아니라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휴우~ 일하면서 밥해먹기가 얼마나 힘들면 이런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을까. 평소 남편이 조금이라도 불평스런 얼굴을 보일라치면 “나처럼 김이 모락모락 나도록 일하면서 저녁상 따끈따끈하게 차려내는 여자 있음 나와보라 그래!”하며 큰소리쳤던 나는 이 책을 남편이 보지 못하도록 꼭꼭 숨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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