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쁘고, 완벽하고, 울거나 소란을 피우는 법도 없고, 잠잘 시간이면 잠자고, 트림하라면 트림하고, 언제 봐도 천사인 아기… 그런 아기가 있을까? 만약 당신 아기가 그렇다면 ‘당신은 할머니’라고 미국 여성들은 농담을 한다.
여름 휴가철을 맞아 손자손녀 손님들을 맞은 가정이 주위에 여럿 있다. 타주에 사는 손자 손녀들이 방학을 맞아 할머니 할아버지 댁을 찾은 케이스도 있고, 아들부부 혹은 딸부부가 여행을 가면서 어린 손자손녀를 잠시 맡기고 간 가정들도 있다. 어느 경우이든 손자 손녀 이야기가 나오면 눈빛부터 달라지는 것이 조부모, 특히 할머니들의 공통점이다.
“내 아이들 키울 때는 이렇게 예쁜 줄 몰랐어요. 일하랴, 아이들 돌보랴 정신이 없었지요. 그런데 손자는 정말 예뻐요”
요즘 첫손자 재롱에 흠뻑 빠졌다는 60대 초반 젊은 할머니의 말이다. “돈 내고 이야기하라는 핀잔을 들으면서도 친구들이 사진까지 들고 다니며 손자손녀 자랑하는 심정을 이제야 알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손자손녀는 왜 그렇게 예쁜 걸까? ‘핏줄의 끌림’을 말하는 사람도 있고, “나이 들고 보니 순진 무구한 어린 생명의 아름다움을 새삼 알겠다”는 사람도 있다. 손자손녀를 보면 수십년 전 아들딸이 어렸을 때의 모습이 떠올라서 더 애틋하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손자손녀는 책임은 없고 즐기기만 하면 되니까” 예쁘다는 대답이 가장 정답으로 들린다. 울면 우는 대로 떼쓰면 떼쓰는 대로 다 예쁘기만 한 것인데 그러다 보니 “손자손녀가 이렇게 재미있는 줄 알았다면 아들딸보다 손자손녀를 먼저 갖는 건데”라는 미국 농담도 생겨났다.
미국사회에서 이 ‘할머니 사랑’의 비중이 점점 커지고 있다. 가끔씩 손자손녀의 얼굴이나 보며 책임은 없이 즐기기만 하면 되던 홀가분한 위치에서 직접 아이들을 맡아 기르는 책임 있는 위치로 자리를 바꾸는 할머니들이 늘고 있다.
인구 조사국이 지난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미전국의 학령전 아동 1,960만명중 엄마를 제외하고는 조부모 손에 자라는 아이들이 가장 많다. 엄마가 일하는 동안 아빠가 아이들을 돌보는 케이스는 17%, 데이케어 센터나 프리스쿨에 가는 아이들은 18% 정도인 데 비해 조부모가 돌보는 경우는 21%에 달한다.
조부모, 특히 할머니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진 것은 전통적 가정의 모습이 변화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 살림하는 아내, 일하는 남편 구도가 허물어지고 부부 맞벌이가 보편화했고, 이혼이 흔해지면서 편모, 편부 가정이 늘었다. 부모가 일하러 나가면 누군가가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데 그 역할을 조부모가 맡는 케이스가 늘고 있다.
이유는 여러 가지 이다. 우선 탁아 비용이 비싸서 웬만큼 수입으로는 아이들 데이케어 비용도 감당하기 어려운 경제적인 이유가 있고, 조부모가 돌보면 아이들이 사랑을 듬뿍 받을 수 있다는 정서적인 배려가 있다. 남들에게 맡기면 아기를 제대로 보살필지 믿을 수가 없는 불안함도 이유가 된다.
한인 이민가정에서 조부모의 희생은 새삼 거론할 필요도 없다. 손자손녀들을 키워주느라 노부부가 이 집, 저 집 거처를 옮겨가며 사는 경우도 있고, 미국의 동부와 서부에 떨어져서 별거 아닌 별거를 하는 경우도 있다.
조부모, 특히 할머니들은 손자손녀 예쁜 맛에, 그리고 자녀들 고생 덜어주고 싶은 마음에 노년을 아이들 키우는 데 쏟고 있는데, 때로는 회의가 없지 않다. 30여년 자영업을 하다가 은퇴한 60대 중반의 여성은 “아이들이 부모에게도 인생이 있다는 걸 너무 모를 때는 서운하다”고 말한다.
“자식 뒷바라지하느라 평생 일하고 나니 이제는 손자손녀 키우느라 또 매여 버렸어요.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이렇게 아이들 몇 키우고 나면 그때는 너무 늙어서 여생을 즐길 수도 없을 것 같아요”
조부모의 역할은 손자손녀를 키워주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능률중심의 경쟁사회에서 부모는 아이들의 인생에 고속도로를 만들어주기에 급급하다. 성적을 챙기고, 재능을 찾아 특기로 키워주는 일들이다. 조부모는 고속도로 주변의 야생화 만발한 들판 같은 정서적 푸근함을 아이들에게 심어준다. 아이들의 삶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개입한다는 것은 축복이다.
권정희 편집위원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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