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치는 사람 옆에 앉아서 악보를 넘겨주는 여자를 영어로는 page turner 라고 하지만, 우리들 사이에서는 넘순이라고 부른다. 물론 남자가 악보를 넘겨줄 경우에는 넘돌이라고 부르게 된다. 가끔 우스갯 소리로, 피아니스트들은 독주를 할 때 보다 누군가의 반주를 할 때 더 떨리고, 반주를 할 때 보다 반주하는 사람 악보를 넘겨줄 때 제일 떨린다는 말을 하는데, 지난주에 내게도 가장 떨린다는 넘순이의 기회가 왔다.
서울대 음대 남가주 동창 자선음악회가 지난 목요일(7월 24일) LA 다운타운 콜번스쿨 지퍼홀에서 열렸다. 나는 미국에서 대학을 다녔지만, 가까이 지내는 바이얼린 전공의 선배 언니 하나가 서울대 음대를 졸업했고, 동대학 7년 후배인 내 룸메이트에게 반주를 부탁하는 바람에 내 주변 인물 두 사람이 함께 무대에 서게 되었다.
연주회 전 약 2~3주간 바이얼린 전공의 언니가 우리 집에 자주 드나들며 룸메이트와 함께 연습을 하였는데, 항상 피아노 소리만 나던 집에서 오랜만에 다른 악기 소리가 나니까 매우 새로운 기분이 들었다.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에어컨과 선풍기를 동시에 틀어놓고 연습을 하며 열심이었다.
연주회날 아침시간부터 바이얼린 하는 언니가 찾아와 오전 내내 피아노와 맞추고 돌아갔다. 연습을 끝마친 룸메이트는 샤워를 하고, 화장을 하고, 머리를 만진 후 드레스와 구두를 싸들고 집을 나섰다.
내게도 음악회 초대장을 주었지만 그 전 날부터 몸살로 앓아 누워있던 나는 음악회고 뭐고 그저 푹 쉬고 싶을 뿐이었다. 연주하는 곡목이 워낙 빠르고 리드미컬 한 부분이 많아서 넘순이를 썼으면 좋겠다는 룸메이트는, 다른 연주자에게 부탁해 보겠지만 혹시 안되면 내게 부탁할 수밖에 없다며, 오게되면 검은 옷을 아래 위 입고 오라고 당부하였다.
연주는 8시 시작이었는데 7시가 조금 넘은 시각부터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잠든 채로 비몽 사몽간에 앤서링 머신을 통해 울려져 나오는 소리를 들으니, 룸메이트가 넘순이를 찾지 못해서 다급히 나를 찾는 모양이었다. 땀에 흠뻑 젖은 몸을 샤워로 씻고, 급하게 검은 정장 바지에 검은색 반팔 니트를 입고 집을 나섰다. 다행히 트래픽은 심하지 않았고 나는 8시 조금 전에 연주회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침에 주스 한 잔 마시고 먹은 게 없는 빈속에 주차장에서부터 계단을 뛰어 올라갔더니 다리가 후들거리고 온 몸에 진땀이 났다. 무대 뒤 복도로 가니 불안한 표정이 역력한 룸메이트가 복도를 서성이며 날 기다리고 있다가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대금 연주로 시작된 연주회는 두번째 출연자인 소프라노가 프란츠 리스트의 가곡을 불렀고, 그 다음이 바이얼린 차례였다.
나는 악보를 들고 바이얼리니스트와 룸메이트가 무대로 걸어나가는 뒤를 따라나갔다. 잠시 줄을 맞추고 바로 연주가 시작되었다.
나는 피바디 예비학교를 다니는 동안 악보 넘기는 법에 대한 교육을 한차례 받은 일이 있는데, 악보를 넘기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먼저 연주가 시작하기 전에 어느 부분을 되풀이 할 것인지, 어느 부분을 뛰어넘을 것인지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듣고 무대에 서야 한다. 넘순이에게 있어서 가장 창피한 순간은 곡이 다 끝났는데 마지막 장을 넘기는 일이다.
빠른 템포의 곡은 약 10마디 전에 먼저, 그리고 느린 템포의 곡은 3~4마디 먼저 일어서서 악보를 넘길 준비를 해야 한다. 너무 오래 일어서 있어도 안 되고, 일어서자마자 너무 급하게 악보를 넘기고 다시 앉아도 안된다. 연주자가 불안하지 않도록 항상 비슷한 시간을 두고 일어서서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피아니스트의 왼쪽 약간 뒤편에 앉아있다가 일어섰을 때는 오른 손으로 넘길 책장의 위쪽 모서리를 약간 접어서 잡고 넘길 준비를 해야 한다. 모서리를 접어서 잡고 있어야 책장을 넘길 때 소리가 나지 않고, 그 뒷장이 따라 넘어오지 않으며, 연주자가 그 다음장의 음표를 미리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앉아있을 때는 연주자가 신경쓰이지 않도록 꼼짝말고 있어야 하며, 향수를 뿌리거나 연주 시작 전에 향이 강한 음식을 먹어도 안 된다.
넘돌이의 경우 양복 재킷을 입었거나 넥타이를 맸다면 책을 넘기려고 일어섰을 때 피아노 치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왼손으로 재킷과 넥타이를 잘 잡아야 하고, 넘순이와 넘돌이는 절대로 반짝이는 귀금속을 착용해서는 안된다.
연주가 다 끝나면 연주자들이 인사하는 동안 조용히 일어서서 악보를 챙기고 그 뒤를 따라 무대를 걸어나오면 된다.
몇년만인지 모른다. 너무나 오랜만에 넘순이를 했더니 긴장감 때문인지 피로가 몰려왔다. 내가 듣던 중 가장 빠른 템포로 연주를 마친 두 사람은 하지만 성공적으로 연주를 마치고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들의 연주에 일조했다는 생각에 나도 뿌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새라 최
<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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