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질 의학
작년 어느 땐가 ‘체질의학’으로 고질적인 아이의 병을 고쳤다는 한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한의사를 찾아간 적이 있다. 어디 아픈 데는 없었지만 건강한 사람도 자기 체질을 알고 거기에 맞는 음식을 찾아 먹으면 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친구의 말에 귀가 솔깃해 남편과 아이까지 데리고 온가족이 진맥하러 간 것이다.
체질의학의 권위자라는 권우준 박사는 한국에서 ‘8체질의학’을 개발하고 보급한 권도원 박사의 아들로, 팔순이 넘은 아버지 권박사는 암 고치는 명의로 정평이 나있어 예약이 몇 달씩 밀려있다고 친구는 자랑스럽게 소개하였다. 그렇게 대단한 사람의 후계자에게 진맥을 받게 되다니, 잔뜩 기대하고 찾아간 권우준 박사는 그런데 만나 보니 내가 소시적 알던 사람이었다.
거의 20년전 처녀시절, 그때나 지금이나 나보다 어린 사람들과 놀기 좋아했던 나는 언니, 언니, 누나, 누나하며 쫓아다니던 한 무리의 아이들과 어울리곤 했는데 권박사도 그중 한 명이었다. 20대 초반의 나이답지 않게 늘 조숙한 표정을 짓고 음성을 내리깔며 폼을 잡는 축이었다고 기억된다. 그가 한국에서 온 유학생이며 아버지가 한의사라고 했지만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줄도 몰랐고, 그 후 통 소식을 듣지 못하다가 어느새 머리가 희끗해진 모습으로 해후한 것이다. 반갑게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때 함께 다니며 연애하던 아가씨와 결혼해 아이 둘 낳고 잘 살고 있다고 하였다.
얘기가 잠깐 샜는데, 권박사가 맥진한 결과 나와 아들은 목양체질, 남편은 토양체질로 진단되었다. 나를 감동시킨 것은 목양체질에게 해로운 음식으로 ‘모든 바다생선 및 어패류’가, 유익한 음식에는 ‘소고기’가 각각 첫번째로 적혀 있는 것이었다.
내 주위의 아는 사람은 모두 아는 이야긴데, 나는 생선을 싫어하고 소고기를 좋아한다. 생선을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익힌 것이든, 날 것이든 물고기는 절대로 먹지 않으며 대신 새우, 가재, 전복, 굴, 오징어 정도만 익힌 것을 먹는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나도 자세히 모르겠는데 하여간 식탁에 오른 생선구이를 보면 머리부터 꼬리까지 시체가 눈을 뜨고 누워있는 것부터 맘에 안 들고, 생선 비린내가 싫어서 입에 대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무조건 생선이 좋다, 야채가 좋다, 고기는 안 좋다 하면서 모든 사람에게 생선과 야채를 먹기를 강요한다. 심지어 일식당에서 식사할 때 스시와 사시미를 안 먹는다고 하면 ‘촌스럽다’느니, ‘비싼 걸로 대접하려 했는데 안 되겠다’느니, ‘건강에 좋은 음식을 왜 안 먹을까’ 하면서 나의 입맛을 무시하고 주눅 들게 하는 발언들을 거침없이 늘어놓는다. 사람들은 왜 남의 식성을 존중하지 않고, 음식에도 ‘급’을 정해서 비싼 걸 잘 먹어야 세련되었다는 평가를 내리는 것일까. 내가 생선을 먹지 않는다고 하면 또 사람들이 반드시 묻는 말이 있다. 집에서도 남편과 아이에게 생선요리 안 해주냐고, 그때마다 내가 하는 말도 똑같다. 난 안 먹지만 생선요리는 누구보다 많이 한다고.
며칠전 권우준 박사를 다시 만났을 때 그는 또다시 너무나 말이 되고 맘에 드는 이야기를 하였다. 누구에게나 다 좋은 음식, 누구에게나 똑같이 좋은 약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 사람마다 강한 장기와 약한 장기가 있어서 그에 따라 맞는 음식이 다르다는 것, 이를 모르고 남들이 좋다하여 자기에게 맞지 않는 음식을 계속 먹으면 면역기능이 떨어져 병에 걸린다는 것, 편식은 몸이 알아서 필요한 음식을 선별적으로 찾아먹는 기능이라는 것, 이처럼 각자 다른 체질들의 일정한 패턴을 찾아내어 체계화시킨 것이 바로 8체질의학이라고 그는 설명해주었다.
이와 비슷한 이론으로 사상의학이 있는데 사상의학은 사람의 얼굴 모양과 골격을 보고 태양, 소양, 태음, 소음인의 4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여 약으로 치료하는 반면, 8체질의학은 모양이 아니라 맥진을 통해 장기적 기능을 판단하여 금양, 금음, 목양, 목음, 토양, 토음, 수양, 수음의 8가지 체질로 분류하고 약이 아니라 침으로 치료한다고 하였다. 나는 일단 체질의학을 믿어보기로 하였다. 왜냐하면 내가 싫어하는 생선을 먹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유일한 이론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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