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오래 살다 보면 한국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에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다. 이번 주부터 남가주의 KTAN-TV가 방영하는 드라마 ‘옥탑방 고양이’가 한 예이다.
MBC-TV가 제작한 이 드라마는 주 단위 시청률 1위를 차지할 정도로 한국에서 인기가 높은데, 드라마를 이렇게 높이 띄운 것은 ‘동거’라는 센세이셔널한 이슈이다. 엄연히 존재하는 사회 현상인데도 불구하고 없는 듯이 덮여왔던 ‘혼전 동거’를 안방으로 끌어들여 이슈화하는 데 성공했다고 한국언론들은 평가했다.
드라마 ‘옥탑방’, 그리고 역시 동거 커플이 등장하는 영화 ‘싱글즈’가 나오면서 한국 인터넷에는 동거에 대한 찬반 의견이 봇물 터지듯 한바탕 어지럽게 쏟아져 나왔다.
동거가 한국에서 어느 정도까지 흔한 현상인지는 알 수가 없다. 우리가 아는 것은 20~30년 전 한국의 분위기,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자녀는 결혼 전까지 반드시 부모 슬하에서 사는 보수적 가족문화였고, 그 문화에서 동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런데 이번 드라마에 쏟아진 열띤 호응, 그리고 원작 소설의 작가가 4년 동거 경험을 당당히 털어놓는 모습을 보면 한국사회가 변하기는 많이 변한 모양이다.
철옹성 같던 가족 공동체 문화에 무엇이 동거라는 불온한 자유가 움틀 여지를 만들었을까.
아무래도 인구의 유동성을 주범으로 봐야 할 것 같다. 직장이나 대학·대학원을 따라 타 도시로 이주하는 것이 보편화하면서, 젊은이들이 자연스럽게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풍토가 조성되었다.
물불 안 가리는 젊은 열정, 부모의 감독 없는 자유로운 환경 - 동거가 젊은 세대 사이에서 삶의 한 방식으로 끼여든 주된 배경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미국에서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은 더 걱정이 많다. 미국이야말로 혼전 동거가 보편화했고, 타주에서 학교·직장에 다니는 자녀들은 1년에 몇번 얼굴 보기가 힘든 형편이기 때문이다. 자녀들이 나이가 20대 중반을 넘고 경제적·물리적으로 독립하고 나면 아무리 부모라도 무작정 잔소리를 할 수만도 없다. 남가주 샌퍼난도 밸리에 사는 50대 초반의 주부가 요즘 심란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동부에서 직장에 다니는 딸이 곧 약혼을 해요. 그런데 약혼하고 나면 동거에 들어가겠다는 겁니다. 결혼식 전까지는 절대 안된다고 강하게 말했지만 수천마일 떨어진 곳에서 아이들이 그 말을 따를지는 확인할 길이 없어요”
딸의 주장은 “무책임하게 동거하는 게 아니라 약혼을 하고 나서 같이 살겠다는 것이다. 살아봐서 정말로 안 맞으면 파혼을 할 수도 있는 것 아니냐. 결혼하고 나서 이혼하는 것보다는 그게 낫다”는 것이다.
“딸의 말이 부모들만 모를 뿐 한인 젊은이들도 동거가 많다고 해요. 미국사회가 워낙 동거를 가볍게 여기니까 그 영향을 받은 것이지요”
미국에서 동거가 급속히 늘어난 것은 지난 30년 사이의 일이다. 30년전 수만에 불과하던 동거 커플은 현재 450만 커플로 늘었다. 결혼하는 부부의 절반 이상이 동거를 거친다고 하니, 결혼 전에 약혼을 하듯 결혼생활 전에 미리 살아보는 것이 수순처럼 되어버렸다.
동거가 이렇게 흔해지자 포춘 선정 500대 기업중 직원들의 동거인에 대해서도 가족에 상응하는 베니핏을 제공하는 기업이 1/3 이상이다. 결혼·가족에 대한 개념이 변하고 있다.
결혼은 사랑이라는 바퀴와 제도·관습이라는 바퀴로 굴러가는 두발 자전거이다. 그래서 부부 사이에 애정이 좀 식어도 제도·관습의 바퀴의 힘으로 해체되지 않고 굴러간다. 그러다 자녀가 생기면 그 때는 세발 자전거이다. 자녀가 세 번째 바퀴 역할을 해서 나머지 두 바퀴가 다 부실해도 “자식 때문에 산다”며 결혼생활은 이어진다.
동거는 사랑이라는 바퀴 하나로 굴러가는 외발 자전거이다. 사랑의 열정만을 추진력으로 바퀴를 굴려간다는 점에서 가장 순수한 합일의 형태이다. 하지만 사랑이 식으면, 두 사람의 마음이 삐끗하면 그대로 자전거는 넘어지고 만다. 보조 바퀴가 없다.
젊어서는 제도·격식을 부수는 파격의 통쾌함과 외발로 달리는 스릴이 눈에 들어오고, 나이 들면 자전거가 넘어질 때의 고통이 눈에 들어온다. 자녀가 성인이 되면 품안에 있을 때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서로 솔직한 대화가 필요하다. 최소한 부모에게 숨길 일 많은 아들딸은 만들지 말아야 하겠다.
권정희 편집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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