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 내 생일이었다. 한국에서 오신 친정 엄마와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현관 앞에 길다란 익스프레스 박스가 놓여 있었다. 풀어보니 꽃이었다. 어머니는 “이 서방이 꽃을 보냈구나” 하며 대견해 하셨지만, 나는 남편이 보내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한번도 남편으로부터 꽃을 받은 적도 없거니와 작은 카드에는 ‘생일 축하한다. 동주가…’ 이렇게 쓰여 있으니 말이다.
한국에 살고 있는 여고동창이자 대학 동창이기도 한 친구가 보내온 것이다.
때 마침 성탄 즈음이어서 흰색, 붉은 색, 장미와 그린 색 잎사귀가 섞인 꽃으로 크리스마스 기분도 낼 수 있어 좋았다.
이번에 아플 적에도 동주는 흰색, 핑크, 노랑, 빨강의 색색 Gerber Daisy로 된 부케를 보내주었다.
한국에서 인터넷 주문을 해서 보내는 것으로 이곳의 꽃집에서 사는 것보다 훨씬 비쌀 터인데… 감동에 앞서 가격을 따져보는 현실적인 아줌마인 나. 신년이 되면 어김없이 학교 달력과 수첩을 보내주기도 하고 수시로 마음을 써 주는 친구. 나는 늘 받고 나서 선수를 뺏긴 것에 아차 하지만, 한 번도 내가 먼저 친구를 챙긴 적은 없으니 늘 부족한 친구 역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곳에 잠깐 다녀 갈 때도 항생제에 관절염용 파스에 제 병원의 약은 다 휩쓸어 오듯 와서 내 건강을 뒷바라지하기도 한다. 한국의 친정아버지가 편찮으실 땐, 구하기 힘든 약을 잔뜩 보내 부모님을 기쁘게 한, 딸 노릇을 대신하는 친구이다.
며칠 전 한국에 계신 엄마가 전화를 하셨다. 동주가 찾아와 제 차로 엄마를 모시고 강화도에 가서 장어구이를 포식하게 해 주더니, 과일과 약을 한 보따리 올려다 놓고는 봉투에 엄마 용돈까지 두고 갔다는 것이다. 엄마는 너무 고맙기도 하고 신세진 것이 미안하기도 하다고 하셨다.
동주에게 고맙다는 이 메일을 하면서 매번 같은 내용을 써야 하는 내가 부끄러웠다. ‘고맙다. 친구야. 언젠가는 신세를 갚을 날이 있겠지…’ 운운하는 내용인데 몇 년째 내가 쓰는 편지의 구절이다.
종합병원에 버금가는 규모의 병원 이사장인 친구는, 한국 갔을 때 보니 의사인 제 남편보다도 더 종횡무진 바쁘게 뛰고 있었다.
요즈음엔 병원이 불경기를 타고 있다고 했었는데… 그 와중에 이역만리의 친구까지 챙기는 마음은 타고난 것이 아닐까? 내게 경제력이 있어도 시간이 있어도 흉내도 못 낼 일일 것 같다.
동주뿐 아니라 내 주변에는, 온 정성을 다해 나를 아껴주는 친구가 많다. 부족한 나를 채워주는 파트너로 하나님이 보내주신 천사 같은 친구들. 그 중엔 동창도 있고 이웃도 있고 교인들도 있다.
어른들 말씀대로 내겐 인복이 있는 것 같다. 남편의 사업에 문제가 생겨서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돈을 빌려주겠다는 말을 먼저 꺼내서 나를 감격시킨 친구. 시도 때도 없이 온갖 맛난 음식을 만들어 보내주는 친구.
내 안경뿐 아니라 우리 식구들의 안경을 평생 책임지는 친구. 우리 가족의 건강을 늘 신경 써 주는 집안 주치의인 친구. 내 글을 일일이 스크랩해 두었다가 남들에게 보여주는 홍보대사를 자처하는 친구까지 내 인생의 도우미로 발벗고 나선 친구들.
나는 부족하고 또 부족하며 이기적이기까지 한데 웬 은혜인지 웬 축복인지 모르겠다. 은연중에 나를 깨우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들어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남을 보고 나를 돌이켜 사람다운 사람이 되라는 무언의 계시가 아닐까? 중년에 이르도록 남에게 베풀고 산 기억이 별로 없다. 그저 남들의 사랑만을 받고 살았다. 그 사랑도 예전엔 받고 나서 바로 바로 갚았다.
밥을 얻어먹으면 며칠 안에 밥을 사서 되 갚아야 마음이 편했다. 선물을 받으면 즉시 갚지 못해 안달하곤 했다. 그래야 ‘경우 바른 사람’이 되는 줄 알았다.
이곳의 친구인 소설가 P의 말을 빌면, 마치 빚 갚는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해서 오히려 정나미가 떨어 진다나? 충격적이었으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맞는 말인 듯 싶었다.
그 뒤론 누구에게 신세진 일이 있으면 다시 생각해 보고 시간의 여유를 두고 천천히 갚는다.
그러다 보니 후의를 오래 곱씹어보고 감사의 마음을 더욱 오래 갖게 되었다.
이렇듯 친구의 말 한마디는 약이 되기도 한다. 충고로 마음 씀으로 내 인생에 도움이 되는 많은 친구들 덕에 이 날까지 살았으니, 이젠 내가 친구들에게 도움이 되는 그러한 사람이 될 차례이다.
내 친구가 내게 그러했듯이 말없이 도움이 되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
이정아<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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