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의 세력이 날로 커지고 있을 때 일이다. 미국의 유대계 커뮤니티 대표단이 백악관을 찾아갔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유대계인 펠릭스 프랭크푸터를 연방대법관으로 지명한 것을 철회해 달라는 요청을 위해서다.
그 동기는 이렇다. 그를 대법관으로 임명할 경우 미국 내에서 반유대주의가 팽배해진다. 이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사태다. 히틀러를 자극할 가능성이 있다. 더 혹심한 유대인 박해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니 제발 조용히 내버려 두어 달라는 이야기다.
유대계 커뮤니티는 당시의 일을 어리석음의 비극적 교훈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히틀러가 저지르는 만행에 서방세계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 결과 나치 히틀러의 파워는 한층 견고해졌다.
침묵은 독재자에게 안통한다. 또 유화적 제스처는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 이 교훈을 유대 커뮤니티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조용한 외교가 옳다. 아니다. 시끄러운 외교가 옳다. 80년대 초 미국의 해외정책을 둘러싼 논란의 초점이었다.
인권이 해외정책의 근간이 되어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20세기는 인권의 세기다. 자유 서방세계가 공산주의 전체주의와 소리없는 전쟁을 벌이는 것도 다름이 아니다. 궁극에 있어서는 인간의 존엄성, 인권을 지키기 위해서다.
문제는 방법론이다. 조용한 외교 지지자들은 공개적으로 특정국가 정부를 자극해 외교적으로 도움이 될 게 없다는 논리다. 인권같은 껄끄러운 아젠다는 막후에서 처리할 성질의 문제라는 주장이다.
그런 와중에 레이건 대통령이 상당히 ‘튀는 발언’을 하고 나섰다. 한 주요 공개석상에서 소련을 ‘악의 제국’(Evil Empire)으로 서슴없이 성토한 것이다.
외교 전문가들은 까무러칠 뻔 했다. 대통령이 외교 수사상 있을 수 없는 발언을 했다는 이유에서다. 카우보이식 발언이고, 노인네의 망발이라는 비난이 들끓었다. 미국뿐 아니다. 유럽에서도 비난과 야유가 쏟아져 나왔다.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지칭한 레이건의 발언은 그러나 엄청난 반향을 불러왔다. 외교전문가들의 우려와는 그런데 정반대의 방향으로 말이다.
동서냉전이 끝난후 구소련 고위 당국자들의 증언에 의해 밝혀진 사실은 이렇다. 진실을 알리는 그 발언은 ‘악의 압제 하에서 신음하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희망을 안겨 주었다는 거다. 그 발언은 소련제국 몰락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조용한 외교가 옳으냐, 시끄러운 외교가 옳으냐. 오늘날 에도 그 논란은 이어진다. 시끄러운 외교가 더 효과적이다. 반드시 그런건 아니다. 공개적이고 무례한 외교적 언사는 역효과를 낼 수 있으니까. 케이스-바이-케이스란 말이 그래서 나온다.
부시 행정부는 북한을 이라크, 이란과 함께 ‘악의 축’의 일원으로 지칭하고 나섰다. 적어도 이 국가들을 상대로는 시끄러운 외교를 선택했다는 의미다. 왜 시끄러운 외교인가.
미국의 오만 때문이다. 그런 측면이 아주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보다는 전체주의체제, 독재자에게는 침묵이 통하지 않는다는 경험의 발로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테러리즘과의 전쟁이란 종교적 전체주의체제와의 싸움’이라는 정의가 이를 뒷받침 하고 있다.
“종교적 자유가 탄압받는 상황에 침묵하는 죄, 신앙의 양심을 지키는 사람에게 고문이 가해지는 사태에 침묵하는 죄, 그런 침묵의 죄를 결코 범하지 않기를 우리는 엄숙히 맹세한다.”
시끄러운 외교정책을 부시 행정부가 표방하고 나서자 영향력 있는 미교회 단체가 낸 성명이다. 단순히 성경책을 지녔다는 것만으로 사형이나, 강제수용소로 보내지는 전체주의체제의 압제에 대해 결코 침묵해서는 안된다는 선언이다.
“당사자란 뜻은 다자 대화란 뜻이다… 모택동·등소평 주석을 존경한다. 두 분은 중국 역사를 새롭게 만들어 오신 분이다.” 중국방문 중 노무현 대통령이 한 발언이다. 예의 그 애매모호한 발언이다. 즉석의 다변이다.
중국의 입장을 한껏 배려했다. 그런데 한가지가 빠졌다. 11개 항의 한중공동성명에도 들어 있지 않다. 북한 인권문제다. 탈북자 문제다. 연일 미소를 뿌리며 중국의 요인들을 만나는 한국 대통령이다. 그런데 탈북자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조차 없다.
중국 공안의 올가미를 피해 숨죽여 지내는 탈북자가 수십만이다. 그 땅을 방문한 대한민국의 노무현 대통령. TV에 비쳐지는 그의 모습을 탈북자들은 어떤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옥 세 철<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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