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망증이 심해진 노부부가 의사를 찾아갔다. 너무 자주 잊어버리다보니 위험한 일이 생길 수도 있겠다 싶어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의사는 “나이 들면 으레 있는 일이다”며 “항상 메모를 하는 버릇을 가지라”고 조언했다.
병원에서 돌아온 후 할머니는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었다. 할아버지에게 아이스크림을 가져다 달라며 “부엌에 가는 동안 잊어버릴 테니 메모를 하라”고 권했다. 할아버지는 자신 있게 말했다 -“나, 그 정도는 기억할 수 있어!”
할머니는 “하지만 아이스크림 위에 딸기를 얹고, 생크림도 얹어야 하니 메모를 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자신이 있었다 - “걱정 마! 나 기억할 수 있어!”
부엌으로 간 할아버지, 달그락 달그락 소리를 내며 뭔가를 만들더니 15분쯤 후 베이컨과 계란을 담은 접시를 들고 왔다. 접시를 힐끗 쳐다본 할머니가 불만에 차서 한마디했다.
“토스트는 어디 있는데?”
미국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건망증 조크이다. 이 조크에 대한 반응을 보면 나이가 짐작이 될 것 같다. “아무리 농담이지만 과장이 너무 심하다”는 반응이라면 20대나 30대, “나이 들면 그럴 수도 있을 거다”싶으면 40대나 50대, “우리만 그런 게 아니구나” 하고 위안이 된다면 60대 이상 연령층이 되지 않을까. 우리 정신의 집에 어느 때부터인가 도둑처럼 찾아들어 우리를 바보로 만드는 것, 그것이 건망증이다.
뭔가를 해야겠다고 분명히 생각했는데 다음 순간 거짓말처럼 완전하게 백지상태가 되는 경험은 40대 중반쯤 되면 낯선 일이 아니다. 부엌에 가기는 갔는데 내가 왜 왔는지 몰라서 물만 마시고 나오는 일, 마켓에 가서 뭘 사러 왔는지 생각이 나지 않아 엉뚱한 물건들만 사고 돌아오는 일, 화장하다가 로션 바른 걸 잊어버리고 두 번씩 바르는 일등은 일상사가 되고 만다.
건망증 때문에 망신을 당하는 경우도 물론 있다. 얼마전 한 동료는 아침 등교길에 한바탕 아이를 야단쳤다.
“분명히 아이에게 양말을 건네 줬는데 양말이 없다며 찾는 거예요. 등교시간 늦는데 늑장 부린다고 야단을 쳤지요. 그러다 느낌이 이상해서 보니 아이 주려고 챙긴 양말을 어느새 내가 신고 있는 것이에요”
사람의 기억능력은 10대 말에서 20대 초반 최고조에 달한다. 대학생 때까지가 가장 뇌기능이 활발한 것이다. 그러다가 25세 정도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여 35세부터는 대개 깜빡 깜빡 까먹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어 40대 후반이 되면 기억력이 뚝뚝 떨어지고 70세쯤 되면 한창 때의 절반 수준이 되고 만다.
미국에서는 인구의 1/3에 해당하는 베이비 붐 세대가 본격적 건망증 연령층이 되면서 기억력 향상, 뇌기능 개선이 주요 관심분야로 부상했다. 평균 수명은 점점 늘어나는데 심신의 기능이 못 따라가면 오래 사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수년전부터 기억력 강화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UCLA 등 대학들은 기억력 훈련 프로그램을 개설하고 있다.
건망증은 왜 생기는 걸까. 여러 가지 과학적인 설명들이 있겠지만 노화만이 원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기억의 세포들이 예민하게 고개를 세우고 받아들일 만한 신선한 경험이 없는 것이 한 원인이 될 것이다.
얼마전 한국의 한 정신과 의사가 중년 남성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질문은 “아내가 가장 예뻐 보일 때는 언제인가?”였다. 뜻밖에도, 혹은 당연하게도 가장 많은 답은 “없다”였다. 어느 잡지에서 이 내용을 읽은 후 나도 같은 질문을 신문사 남자 동료에게 해보았다. 대상을 너무 잘 고른 탓일까, 그 역시 잠시 생각하더니 “그런 때 없는데…”라고 ‘정답’을 말했다.
수십년 같이 살아서 더 이상 호기심도, 감흥도 느낄 수 없는 무덤덤한 대상이 배우자만은 아닐 것이다. 중년쯤 되면 삶 자체가 그러하기 쉽다. 10번쯤 본 영화같이 그날이 그날 같아서 열정은 상실되고, 무관심이 습관이 된 권태로운 삶이 기억력 감퇴와 무관하지 않다.
문제는 삶의 자세이다. 반쯤 드러누운 듯 무기력한 삶의 자세를 다시 꼿꼿이 세워야 하겠다.
그래서 삶에 긴장이 들어간다면, 가슴 두근거리는 기대감이 생긴다면 건망증이라는 정신의 도둑도 그렇게 쉽게 주인 행세를 하지는 못할 것이다.
권정희 편집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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