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에 만나 78세까지
노택진-인화 동갑 부부
로맨틱한 멋진 회혼식
‘충실한 남편-현모양처… 선택 잘해 후회 없어’
60년전 플라워 걸 두 누이가 다시 꽃들고 입장
1943년 5월3일 열렸던 60년 전의 결혼식 사진. 일제가 서양식 결혼을 엄금해 신랑은 턱시도를 못 입고 신부는 면사포를 못 썼다. 그러나 시누이가 면사포를 몰래 가져와 사진 찍을 때만 살짝 썼다고 한다.
이처럼 아름답게 해로해온 부부가 또 있는지 모르겠다. 78세 동갑, 멋쟁이 노부부로 주위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아온 노택진·노인화 부부가 결혼 60주년을 맞았다. 만년 연애하듯 살아온 부부라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어제 같은 세월이었겠지만 어느새 육십갑자 돌아 회혼을 맞이한 것이다. 연애하면 퇴학당하던 시절, 남몰래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키웠고, 대동아 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5월 꽃다운 18세 나이, 지금으로 치면 틴에이저 때 결혼한 노씨 부부는 슬하에 2남2녀를 두고 다복하게 살아왔다. 지난 14일 오후 5시 큰딸 조현숙씨의 멋진 선셋힐스 저택 가든에서 친척 친지 120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회혼식은 어떤 결혼식보다 더 아름답고 로맨틱했다. 평소 기자가 개인적으로 깊이 존경하며 우러러온 어른들이라 더 뜻깊고 부러웠던 황혼의 연가. 어느 누구라도 본 받고 싶을 두 분의 삶을 가까이서 들어보았다.
“아내는 한마디로 최고의 현모양처였어요. 모든 일을 얼마나 지혜롭게 처리하는지 나이 80이 되도록 외도 한번 못해 봤지요(웃음). 아이들도 야단 한번 안 치고 감동시켜서 엄마 말을 듣도록 하는 사람이니 말해 무얼 하겠습니까. 결혼은 선택인데, 그 선택을 너무나 잘했기 때문에 살아온 세월에 아무런 후회가 없습니다.”
“남편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가정적인 사람입니다. 해외 출장을 가서도 반드시 일주일에 2통씩 편지를 보냈지요. 편지의 말미에는 언제나 ‘충실한 당신의 남편’이라고 쓰곤 했던, 정말 충실한 남편이었습니다. 너무너무 자상해서 친구들이 언제나 샘을 내고 부러워했지요”
나성영락교회에서 손꼽히는 잉꼬부부, 가장 유머감각이 뛰어난 커플로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을 독차지해 온 노택진·장인화 부부는 언제 보아도 멋쟁이, 잘 생긴 외모에 팔순을 바라보는 할머니 할아버지답지 않게 세련되고 여유 있는 모습으로 눈길을 끄는 커플이다.
두 사람은 신의주에서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로 옆집에서 자랐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옛날이라 연애는 생각도 못하던 시절이었지만 중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운명적인 만남의 순간이 찾아왔다. 8남매 중 맏이인 노택진씨가 옆집에 놀러간 동생을 찾으러 갔다가 4남매 중 맏이인 장인화씨를 보게 된 것.
“그녀를 보는 순간 한 눈에 반해 버렸다”고 회상하는 노택진씨의 얼굴엔 아직도 그 흥분이 느껴지는지 밝은 홍조가 떠올랐다.
“지금처럼 셀폰이 있습니까, 이메일을 보낼 수가 있습니까? 부모님들 몰래 편지하느라 애 많이 썼지요. 아홉 살짜리 여동생이 대문 열면 삐꺽 소리 날까봐 개구멍으로 기어다니며 눈치껏 우편배달부 노릇을 열심히 해줬습니다.”
그때부터 불붙은 사랑은 2년4개월만에 결실을 맺었지만 그동안은 살얼음 위를 걷는 것 같았다. 연애하는 걸 들키면 집안과 문중에서는 죄인이요, 학교에서는 당장 퇴학당해 다음날로 군대에 끌려가야 했던 시절이었기 때문. 그 살벌하고 엄중한 분위기 속에서도 동생의 배달만으로는 모자랐던지 긴 나무막대기 끝에 편지를 매달아 다락방으로 밀어 넣기도 했고, 교회 예배실 앞에 벗어놓은 인화씨의 신발 속에까지 편지를 넣어놓았다니 그 애타던 정열을 짐작할 수 있겠다.
“옆집 동생이 편지를 들고 올 때마다 어찌나 간이 콩알만해졌는지 ‘또 편지 갖고 왔느냐’고 쌀쌀맞게 야단도 많이 쳤지요. 그래도 신의주에서 제일 큰 백화점집 아들이었던 그이는 좋은 집안에, 잘 생기고, 공부도 제일 잘하는 일등 신랑감이어서 가슴 설레곤 했답니다”
두 사람의 사랑은 노택진씨가 대학에 가게 되면서 열매를 맺었다. 고향을 떠나 서울의 경성제대에 입학하게 된 그가 결혼시켜 주지 않으면 안 가겠다고 떼를 썼기 때문. 이미 연애편지를 들켜 둘 사이를 눈치챈 양가 부모는 결국 손을 들었고 약혼을 거쳐 결혼식을 올려주었다.
지금으로 치면 철없는 틴에이저 시절에 한 결혼이었지만 그 사랑은 살아가면서 더하면 더했지 결코 변치 않아 주위에서 가장 모범적인 부부로 늘 존경을 받아왔다. 특히 네 자녀의 부모에 대한 기억은 “서로 너무 사랑하세요”(They’re so in love)라는 말뿐.
평생 순탄하게 살아왔지만 어려웠던 시절도 있었다. 6.25 전쟁이 막 터진 후 인화씨는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남편과 남동생을 꽁꽁 숨겨놓고는 총칼을 목에 들이대는 인민군 앞에서 끝까지 버텼고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한밤중에도 강변에 나가 탄피를 주워 나르는 등 온갖 노동을 마다하지 않았던 용감한 아내였다고, 노택진씨와 자녀들은 그 이야기를 회상할 때마다 목이 메이곤 한다.
서울 의과대학 1학년 때 해방을 맞은 노택진씨는 전공을 바꿔 법과대를 졸업한 후 재무부에 취직, 20년 가까이 공무원으로 성실하게 일해 왔다. 59년부터 재무부 수행 출장차 세계 각국을 다니면서 열린 마음과 미국식 매너가 몸에 배인 노씨는 어디를 가도 아내에게 편지를 보내며 사랑을 고백해 왔다. 한 예로 1967년 캐나다에 갔을 때 당시에도 귀했던 밍크 목도리를 선물로 사왔는데 거기에 분홍색 천이 바느질도 꼼꼼하게 붙어 있더란다. 다음의 글은 그 천에 펜으로 꼭꼭 눌러 쓴 글이다.
“나의 사랑하는 아내 인화에게. 우리의 결혼을 기념하여. 당신의 충실한 남편 택진은 이 조그마한 목도리가 추운 겨울의 눈보라로부터 당신의 몸을 따뜻하게 감싸줄 수 있듯이 나의 마음도 당신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줄 수 있을 것을 바라면서…” 지금 세대의 젊은이가 읽어도 부럽기 짝이 없는 연서가 아닐 수 없다.
노씨는 공직생활도 원칙대로만 해온 신사였다. 줄을 대며 부탁해 오는 사람들에게 하도 ‘no’를 많이 해서 부하 직원들 사이에 ‘노장관’으로 불렸다는 노씨는 가장 모범적인 공무원으로 선정돼 공무원 교육원의 교수부장으로 발탁되기도 했다.
“그 바람에 나는 적은 월급으로 살림하느라 힘들었지요. 물론 부잣집 아들이라 고생하진 않았지만 평생 사과 한 상자도 받아본 일이 없고 자개단스 하나, 보석 하나 장만해 본 일이 없어요. 그저 내세울 것이 있다면 부러운 것 없이 살면서도 사치하지 않았고 아이들 과외 안 시키면서 자기 능력대로 공부시킨 것이라고 할까요”
원래 시댁이 트이고 개화된 집안이었다고 회상하는 노인화씨는 시집갔더니 시어머님이 시누, 시동생들에게 아가씨, 도련님이란 호칭을 쓰지 말고 서로 이름을 부르게 시켰다고 한다. 시아버님 역시 전통 폐습과 형식을 싫어해 큰 백화점 사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장에서나 가정에서도 청소를 도맡아하셨고 식모도 반드시 한 상에서 밥을 먹게 했다니 당시로서 얼마나 파격적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겠다.
노씨 부부의 가정이 미국으로 이민 온 것은 1970년. 미국을 여러 번 드나들면서 살기 좋다고 생각하던 차에 서울공대에 합격한 큰아들이 색약이라며 신체검사에서 떨어지자 이민을 결심했다. 미국 대학은 색약 여부를 따지지 않기 때문.
아들이 군복무를 마치자마자 떠나올 때 왜 가느냐고 잡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정부에서도 좋은 자리를 줄 테니 가지 말라며 붙잡았으나 그때도 노씨의 최우선 순위는 ‘가정’.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서는 명예고 뭐고 다 필요 없다며 미련 없이 떠나왔다.
샌프란시스코에 자리잡은 노씨 부부는 5년간 모텔을 운영하다가 아이스크림 전문 레스토랑을 10년간 운영했고 86년 은퇴해 LA로 내려왔다.
그동안 4남매 모두 UC버클리 등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며 자리잡았고 슬하에 8명의 손자손녀를 보았다.
장남 노현철씨(58)는 샌프란시스코 건축회사 부사장, 장녀 현숙씨(56)는 주류사회에서 유명한 가구점 ‘블루 프린트’(Blue Print)의 사장, 차남 현범씨(51)는 공인회계사, 막내딸 현원씨(46)는 피닉스에서 부동산업으로 성공한 삶을 살고 있다.
은퇴했지만 건강하고 활기 넘치는 노씨 부부는 아직도 일하고 자원봉사하며 노후의 삶을 보람되게 보내고 있다. 노택진씨는 장녀 현숙씨의 ‘블루 프린트’에 주 5일 출근, 재정관계 업무를 도와주고 있고, 노인화씨는 YWCA와 합창단, 퀸오브 앤젤스 병원 등지에서 자원봉사하고 있다.
회혼례란…
자손 모두 생존한 부부만 치러
신랑 노택진씨와 신부 장인화씨의 회혼식에는 양가의 모든 형제자매가 한국과 미국 각지에서 다 참석해 가족만 70명이 넘는 대 연회가 되었다. 60년 전의 혼례식을 다시 재현한 예식에서 특별히 감동적이었던 것은 60년 전 결혼식 때 플라워걸들이었던 신랑의 누이동생 노옥순 교수(전 이대 사회과학대 학장)와 신부의 누이동생 장희경씨가 다시 플라워 걸을 맡아 꽃을 들고 입장한 것. 당시 6세였던 소녀들이 66세가 되어 화관을 쓰고 꽃바구니를 들고 들어와 인기를 모았다.
예식이 끝난 후에는 형제 자매들이 다 나와 두 사람이 연애하던 시절의 에피소드와 재미있는 추억들을 소개해 폭소를 자아냈고, 신랑의 네 자매, 장인화씨의 조카들이 합창도 했으며 연애편지 배달부였던 노옥신씨에게 공로패도 수여됐다.
아름다운 테이블 세팅에 정성껏 마련한 음식과 샴페인이 분위기를 한껏 돋웠던 회혼식 다음날 양가에서 모인 형제자매들은 모두 함께 멕시코 리비에라로 크루즈 여행을 떠났다.
회혼례란 결혼 60주년을 맞는 부부가 자손들 앞에서 사모관대 혼례복을 입고 60년 전과 같은 혼례식을 올리며 ‘해로 60년’을 기념하는 의례. 자녀들은 친척 친지들을 초대하여 성대한 잔치를 베풀고 부모의 회혼을 축하한다. 회혼식은 자손들이 모두 생존해 있는 다복한 부부만 할 수 있으며 평균수명이 짧았던 옛날에는 극히 드문 일이어서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글 정숙희 기자·사진 홍재철 기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