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신마비로 투병중인 ‘수퍼맨’ 크리스토퍼 리브가 이런 회고를 한 적이 있다. 지난 95년 그가 말에서 떨어져 장애자가 된 후 낯설고 고통스런 삶에 적응하던 초기의 일일 것이다.
“내가 뭔가를 필요로 하면 옆의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얼른 2층으로 뛰어 올라가서 가져다줄게’. 그런 무심한 말들이 나를 가장 아프게 했습니다”
상대방의 의도는 한점의 의혹없는 호의이지만 ‘뛰어 올라가는’일이 불가능한 그에게는 그런 평범한 말과 행동이 비수가 되어 상처를 들쑤셨다고 했다. 상처가 깊은 사람은 스쳐 지나가는 바람 한줄기에도 영혼까지 욱신거리는 통증을 경험한다.
지난 2주 동안 한인 입양인들이 갑자기 뉴스의 초점이 되었다. 연방 이민국으로부터 추방명령을 받은 애론 빌링스씨(27, 한국명 권성호)와 라스베가스에서 경찰과 대치중 자살한 벤자민 조셉 케네디씨(29)가 그 주인공들이다.
빌링스씨는 마리화나 소지 및 판매 혐의로 조사를 받던 중 몇 년전 차량절도로 징역을 산 사실이 드러나면서 추방 위기에 직면해 있다. LA 한인 입양인 협회는 한국말도 모르는 그가 한국으로 추방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각계에 도움을 호소하는 중이다. 케네디씨는 미네소타에서 3명을 살해한 후 도주한 혐의로 수배를 받던 중 지난 16일 새벽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불미스런 사건과 관련, 해당자의 입양 여부를 부각시키는 것은 반듯한 시민으로 성장한 수많은 입양인들을 생각할 때 공평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미성년기를 갓 넘어서면서 탈선의 길로 빠져든 케네디씨나 빌링스씨 등의 케이스를 계기로 입양아로 자라는 아픔에 우리가 관심을 가질 필요는 있다고 본다. 그들은 너무 아파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고, 한인사회는 너무 무관심해서 아무 말도 들을 수가 없었다.
입양아들의 아픔은 한마디로 보통아이들처럼 평범해볼 수가 없는 것이다. 전신마비 환자에게 ‘뛰어 올라가는’ 평범한 행동이 실현 불가능한 사치이듯 입양아들에게는 내 집에서, 내 부모 밑에서 사랑도 받고 야단도 맞으며 자라는 평범한 생활이 사치이다. 한인 입양인 협회를 취재하다 만난 한 청년은 말했다.
“보통의 삶을 살아보는 게 소원이지요. 부모님이 있는, 적당한 소득의 가정에서 음악도 듣고, 풋볼 구경도 가면서 보통 아이로 자라나 대학에 가고,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아 보통의 성장기를 갖게 해주는 것, 그것이 소원입 니다”
가족들과 있으면 완성된 퍼즐같이 쏙 끼여들고, 학교에 가면 학생들 속에 파묻혀 드러나지 않는 편안한 소속감 - 입양아들에게는 그런 소속감이 채워지지 않는 갈증으로 남아있다. 집안에서도, 학교에서도, 샤핑몰에서도 물위의 기름처럼 이질성이 도드라져 “나에게 쏠리는 사람들의 눈길이 고문이었다”고 성인이 된 입양인들은 입을 모았다.
2살 때 입양돼 샌디에고에서 자란 30대 초반의 조 랜킨씨는 ‘뿌리와 가지의 갈등’으로 입양아들의 아픔을 표현 했다.
“뿌리는 한국인인데 거기서 미국인의 가지를 만들어 내려니 얼마나 힘이 들겠어요”
다시 버림받지 않으려는 생존 본능에 백인 보다 더 백인이 되려고 애를 쓰지만 번번이 그런 노력을 무참하게 짓밟는 것은 거울이다. 거울 속에서 마주 쏘아보는 아시안 얼굴 - 가지들로 아무리 감춰도 숨겨지지 않는 뿌리이다. 그 뿌리가 되살려 내는 것은 존재에 대한 끝없는 의문이다. 나는 누구일까. 내 어머니는 누구일까. 왜 나를 버렸을까. 나를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입양되지 않았다면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
생후 3개월에 입양돼 인디애나에서 자란 리 시크씨는 “존재는 숨죽인 울음- 쉼에 대한 갈망”이라고 시 ‘홈리스’에서 썼다. 인종적 열등감, 또래들의 놀림, 이웃들의 동정어린 눈길, 양부모와의 거리감, 친부모에 대한 원망·그리움 …속으로 누르고 누르던 울분은 사춘기에 접어들며 종종 터 진다.
“양부모가 아무리 사랑해줘도 다른 민족 부모 밑에서 자라는 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늘 가시방석이지요”
입양인들은 상처가 깊은 사람들이다. 그들이 고향을 찾는 기대감으로 찾은 한인사회에서 또 다시 배척감을 느꼈다는 말은 가슴아프다. 우리가 그들을 품어 안는다면 그들도 이제는 ‘보통의 삶’이라는 사치를 누릴 수 있지 않을까.
권정희 편집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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