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매일 편지할게”
한국의 국가대표 축구선수인 안정환씨가 지난 2일 신병 교육대에 입소했다는 뉴스와 함께 스포츠 신문을 큼지막하게 장식한 제목이었다.
그 며칠전의 한·일전에서 안씨가 결승골을 성공시켜 인기가 새삼 올라간 탓일까, 4주로 예정된 그의 입소 소식을 스포츠신문마다 대대적으로 다루었다. 장발의 퍼머 머리를 짧게 깎아 단정해진 모습으로 손을 흔드는 안씨, 그리고 그 옆에는 한 손으로 눈물을 닦는 여성의 사진이 나란히 실려 있었다.
“오빠가 군대 간다고 여동생이 저렇게 슬퍼할까?”- 의아하게 생각하다보니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 여성은 안씨의 아내이고, ‘오빠’는 남편을 지칭하는 말이라는 사실이었다.
미국에서 오래 산 한인들에게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생경한 호칭이‘오빠’이다.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는 이 헷갈리는 언어적 유행을 아직 모르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자녀들이 영어권이어서 한국의 젊은이들 문화를 접할 기회가 없는 중년층들이 대개 이 부류에 속한다.
지난해 ‘위기의 남자’라는 한국 드라마가 방영되었을 때였다. 남편의 배신으로 이혼한 여자 주인공이 직장의 젊은 사장과 사랑에 빠지는데 그 두 사람의 애틋한 감정 때문에 몹시 괴로워하는 여성이 있었다. 그 여성이 젊은 사장을 ‘오빠’라고 불러서 드라마 내용을 이해하는 데 한동안 어려움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여러 주부들로부터 들었다.
“상대 여성이 아이 딸린 이혼녀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여동생이 오빠의 연애에 그렇게 분개한다는 게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알고 보니 ‘오빠’란 친오빠가 아니라 남편을 말하는 것이더군요”
남편에 대한 ‘오빠’ 호칭은 한국사회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다. 미주의 젊은 부부들 사이에서도 널리 퍼진 유행이다. 신혼 때는 물론이고 아이가 너덧살 될 때까지도 남편을 ‘오빠’로 부른다는 여성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 20대, 30대 연령층인 그들의 설명은 이렇다.
“학교 선후배로 만나 연애를 하면서 ‘오빠’라고 불렀는데 그 습관이 결혼해서도 안 없어져요. 시부모님들이 싫어하셔서 어른들 계실 때는 아예 부르지를 않지요”“‘여보, 당신’은 너무 징그럽고 ‘오빠’가 부담 없고 편해요”
‘오빠’가 등장하기 전에는 ‘아빠’가 있었다. 결혼한 여성이 “우리 아빠가 …”를 연발하면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인지 남편 이야기인지 구분이 안될 때가 있다. 50대, 60대의 여성이 공개석상에서 “아빠, 아빠”를 부르면 듣기 민망한 경우도 없지 않다.
‘아빠’든 ‘오빠’든 일종의 ‘호칭 파괴’인데 그것이 긍정적 파괴인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언어와 의식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언어는 의식을 반영하고, 의식은 또 언어를 구속한다. 한국에서 호칭이나 경어체계가 엄격한 것은 그 사회의 분명한 위계 질서와 무관하지 않다. 누구를 만나든 그가 윗사람인가, 아랫사람인가를 따지고 그에 맞게 호칭과 말을 가려 써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의식구조이다.
미국에 처음 와서 학교에 다닐 때 가장 큰 문화적 충격은 교수에 대한 호칭이었다. 나이 지긋한 노교수들에 대해서는 ‘Mr. …’로 공대를 했지만 나머지 젊은 교수들에 대해서는 학생들이 모두 퍼스트네임으로 부르는데 처음에는 잘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런 격의 없는 호칭으로 경직된 관계를 풀어 팀웍을 이루는 데 성공한 예가 히딩크 감독의 한국 대표팀 케이스였다. 히딩크 감독이 선후배 관계로 복잡다단하게 얽힌 선수들의 관계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그라운드에서 무조건 이름을 부르게 했던 사실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래서 지난해 ‘월드컵 신화’ 이후 히딩크 식 ‘호칭 파괴’가 유행하기도 했다. 사내에서 사장, 부장 등 직위 호칭을 없애고 이름으로 전직원을 부르는 제도를 시도한 기업들이 생겼다. 호칭을 대등하게 바꾸면 위계질서로 꽉 막인 의식에 숨통이 트일 수가 있다.
호칭은 관계를 설정한다. 남편을 ‘오빠’로 부르는 것은 첫째, 잘못된 어법이고, 둘째, 대등해야할 부부관계를 상하 구조로 만든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오빠’는 어리광을 부리며 기댈 수 있는 편안한 대상이기는 하지만 평등한 상대는 아니다. ‘여보, 당신’이 어색하다면 영어의 ‘honey’도 좋고 이름을 불러도 좋다. 바른 호칭이 바른 관계를 만든다.
권정희 편집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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